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무뎌지지 않아, 남아프리카의 설렘 공화국

무뎌지지 않아, 남아프리카설렘 공화국 

희망봉 가는 길에 서 있는 외로운 등대는 빛이 났고, 크루거 국립공원 공항 활주로에는 멧돼지 품바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테이블마운틴에 걸터앉아 바라보는 하늘에서는 오묘함이 묻어났다. 과다 설렘으로 한동안 모든 것에 무뎌지는 게 아닐까 슬쩍 걱정이 차올랐지만, 틀렸다. 첫사랑, 첫 키스, 첫 여행의 설렘은 결코 무뎌지지 않으니까.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프리카 대륙 남부에 위치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대서양과 인도양에 둘러싸여 있으며, 우리나라의 다섯 배가 넘는 크기의 면적을 자랑한다. 인구의 80%가 흑인이며 그 외 백인, 컬러드(혼혈), 인도인 등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져 ‘무지개의 나라’라고 불린다. 사파리 외에도 액티비티 레저와 문화적, 자연적으로 발생한 다양한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다.

Durban 더반 

맛깔스럽게 버무려지다

시작은 열정 충만한 줄루족(Zulu) 태생 가이드의 이야기였다. 천 개의 언덕(Valley of a Thousand Hills)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줄루족의 전통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이동하는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더반에 대한 설명을 쏟아냈다.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영국과 계약을 맺었던 인도인은 결국 시민권을 받지 못했다거나 더반줄라이(Durbanjuly) 페스티벌은 경마축제지만 진짜 볼 거리는 참가자들의 돋보이는 패션이라는 등 뒤죽박죽 이야기에 집중력이 흐려질 때쯤 더반의 지나온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났던 제국주의 전쟁의 결과로 영국은 1835년 더반을 차지했고, 줄루족, 아프리카너들(네덜란드 이민자)과의 크고 작은 전쟁을 통해 더반에서의 입지를 온전히 굳혔다. 이후 1860년대에 사탕수수 사업의 확장을 위해 인도인들을 계약 노동자로 고용하면서 더반에는 줄루족, 인도인, 영국인들의 문화가 정착하게 됐다는 것이다. 핍박받는 계층의 문화를 사라지기 쉬운 법이지만 더반에서 이 모든 문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남아 있는 이유는 다양성이 존중되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양한 문화의 공존! 더반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매력입니다.” 그제야 두서없던 가이드의 말이 조금 이해되면서, 뜬금없이 어제 저녁 호텔에서 먹었던 커리 요리가 생각났다. 인도 커리보다 양념 맛은 강하면서 식감은 더 부드럽고, 모든 재료의 맛이 살아 있는, 독특한 향신료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맛! 더반은 그런 도시다. 다양한 문화가 커리처럼 맛있게 버무려져 있는, 세상 맛깔스러운 도시다. 

날씨는 잠시 쉬어 가는 걸로

‘어느 시기에 와도 가장 따뜻한 곳’이라 자부하는 더반의 날씨는 무용지물이었다. 그 토요일엔 부슬부슬 내리는 비와 함께 약간의 추위가 도시에 내려앉았다. 매주 토요일 노스비치(North Beach)를 따라 파크런(Park Run) 이벤트가 열린다는 이야기에 숙소를 나섰다. 슬쩍 슬쩍 내리는 비와 함께 도착한 노스비치 해변은 날씨와 무관하게 활기가 넘쳤다. 열정이 가득한 서퍼는 인도양 파도와 한 몸이 되어 서핑을 즐겼고, 가랑비 따위는 살포시 무시하며 달리는 러너들이 지나갔다. 자전거 트랙에는 아이의 어설픈 페달 밟기에 까르르 웃는 가족들이 있었다. 구름을 품은 무심한 날씨가 사람들의 여유에 완패 당한 것이다. 어느 휴양지에서나 볼 수 있는 평안한 토요일 아침이 노스비치에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한바탕 해변 구경을 끝내고 아이 하트 마켓(I Heart Market)으로 향했다. 매달 첫 번째 토요일에 열리는 아이 하트 마켓은 인도의 한 입 주전부리 사모사(Samosa)부터, 어제 수확한 싱싱한 마카다미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통 음식인 수제 빌통(Biltong)까지. 더반의 매력인 문화의 다양성을 한 번에 경험할 수 있는 플리마켓이다. 지갑을 열어야 하는 순간을 자주 마주 한다는 것이 이 플리마켓의 유일한 단점이랄까. 아기자기한 구경거리에 즐거움이 한껏 차올랐을 때 어디선가 비눗방울이 날아왔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커다란 비눗방울을 넘나들며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환한 미소에 마음 한편의 짐으로 여기까지 가져왔던 걱정 하나가 오버랩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간다고 하자 지인들이 치안에 대한 걱정을 쌓기 시작했었다. 그런데 내가 마주한 더반뿐 아니라 방문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도시와 거리는 어느 나라의 일상과도 다르지 않은 삶이 흐르고 있었다. 길거리의 카페에서는 브런치가 한창이고, 이 나라의 택시 아저씨도 말 걸기를 좋아했다. 줄루족 아이들은 여행객에게 순수한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고작 며칠 지나가는 여행객의 눈에는 골목길 뒤에 숨겨진 또 다른 모습들이 쉬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내 경우에 걱정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Cape Town 케이프타운

하늘과 맞닿은 땅에 이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눈부시게 파란 하늘에, 살랑거리는 바람과 햇살까지. 테이블마운틴(Table Mountain)을 오르기에 이보다 적당한 날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이블마운틴은 4~5억년 전 바다에서 생성된 사암이 융기하여 형성된 지형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약 3km의 평평한 고원이 펼쳐지는데, 동쪽에는 악마의 봉우리라 불리는 데빌스 피크(Devils’ Peak)가 있고 서쪽에는 호랑이 머리를 닮은 라이언 헤드(Lion’s Head)가 있어 테이블마운틴의 파노라마 뷰를 완성한다. 남동풍이 불 때면 산의 정상에 식탁보(Table Cloth)라 불리는 구름이 형성되어 등반이 불가능한데, 다행히 이날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처음 마주하는 장면에 설렘이 폭발했다. 일단 케이블카부터 달랐다. 바닥이 360도 회전하기 때문에 제자리에 서 있어도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아차, 기대감 때문에 잠시 무서움을 잊고 있었다. 케이블카는 산의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가속하는 듯했고, 질끈 감은 눈에서는 눈물 생성이 가속되었다. 한바탕 눈물 뒤에 마주한 테이블마운틴은 오묘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분명 눈앞에 마주한 끝은 산의 끝자락인데 마치 넓은 대지에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혹은 하늘에 새겨진 길을 따라 걷는 기분이랄까. 마음이 시원하다 못해 뻥하고 뚫려버렸다. 카메라 셔터와 손가락이 하나인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다 문득 모든 것을 멈추었다. 마음껏 눈으로 보아도 아쉬운 장면이기에, 따스한 집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이 생각나서, 혹은 산 끝자락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여유가 나에게도 닿기를 바라며, 이런저런 이유로 셔터는 휴업했고, 몇 번의 바람 숨결을 느끼고서야 그곳과 이별할 수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흥미롭다

시내를 빠져나와 대서양을 끼고 드라이브가 시작되었다. 목적지는 희망봉(Cape of Good Hope). 눈이 호강하는 채프먼스 피크 드라이브(Chapman’s Peak Drive)를 지나고, 산을 넘어가는 구름,  몇 마리의 야생 타조를 만나고 나니 희망봉이 눈앞에 나타났다. 1488년 인도로 넘어가는 항로를 찾던 포르투갈의 바르톨로뮤 디아스(Bartolomeu Dias)에 의해 발견된 이곳의 처음 이름은 폭풍의 곶(Cape of Storms)이었다. 거센 바람과 물길에 더 이상 인도를 향한 희망 따위는 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이라고 하던가. 이곳만 지나면 인도로 향할 수 있다고 생각한 주앙 2세(JoaoⅡ)는 ‘희망봉’이라 명명하였고, 1498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까지 닿는 항로를 개척해냈다. 해변에서 희망봉까지 오르는 시간은 10분. 오르는 내내 바람이 몰아쳤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쉽사리 내어 주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마주한 정상에는 그 흔한 이정표조차도 없었다. 그저 인도양과 대서양의 힘겨루기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와, 망망대해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높이의 봉우리를 발견하고 안심했을 선원들의 마음만이 쌓여 있었다.

희망봉 정상에 조그마한 바람을 하나 살포시 올려 놓고, 케이프 포인트(Cape Point)로 향했다. 케이프 포인트는 희망봉에서 6km 떨어진 곳으로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쪽 끝자락이 닿는 곳이다. 이곳에 희망봉의 옛 등대가 세워져 있다. 지금은 디아스 포인트(Dias Point)에 새로 설치된 등대에게 바닷길 나침반의 업무를 내주었지만, 역사적, 상징적 의미로 이곳을 찾는 관광객에게는 여전히 아프리카 대륙의 남서쪽 끝자락이자 또 다른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오르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탑승료 70랜드의 푸니쿨라(Funicular) 케이블카로 순간 이동을 하거나 드넓은 바다를 천천히 두 눈에 담으며 튼튼한 두 다리로 오르기. 무엇을 선택해도 상관없다. 결국은 정상에서 만나 세계로 향하는 이정표를 바라보게 될 테니까. 먼저 도착한다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케이프 포인트이다. 

볼더스 비치(Boulders Beach)에 들어서자마자 환호성이 터졌다. 아프리칸 펭귄(African Penguin)이 나와 있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햇살 아래 일광욕을 즐기는 펭귄이라니. 상상만큼이나 귀엽다. 볼더스 비치는 테이블마운틴 국립공원에 있는 해변으로 아프리칸 펭귄 보호구역이기도 하다. 수영은 금지되어 있고, 해변 위로 정리된 산책로로만 걸으며 펭귄을 관찰할 수 있다. 아프리칸 펭귄은 남극 펭귄에 비해 몸집이 작아 모태 귀여움이 장착된 셈인데, 눈가의 분홍 라인이 치명적인 매력 포인트이다. 귀엽다고 손을 내밀거나 만지려는 시도는 절대 금물이다. 귀여움 속에 감춰진 부리의 힘은 가공할 수준이라고. 그래도 엄마의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는 아가 펭귄들이 자꾸만 웃음을 터지게 한다. 문득 ‘모든 걸 다 가진 느낌이 이런 걸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테이블마운틴에서는 

아프리카 대륙의 자연 그대로가 느껴졌고, 프랑스후크(Franschhoek) 마을에서는 유럽 소도시의 아기자기함이 묻어났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워터프런트(V & A Waterfront) 쇼핑몰에서는 세련미가 흐르고, 희망봉은 대서양과 인도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함을 품고 있었다. 방금 본 펭귄은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오는 귀여움까지 장착했다. 이건 모두 케이프타운의 이야기다. ‘영국 BBC가 선정한 죽기 전에 가 봐야 하는 도시’ 등등의 수식어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