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을 보는 우리,
오사카 힙스터라고 불러줘
원한다, 새로운 것. 느끼고 싶다, 눈과 귀와 온몸으로. 멋지다, 오사카에서 공연을 즐기는 나라는 사람.
전적으로 케렌을 위한 여정
라면 먹으러 일본 간다는데, 라면 대신 공연 보러 일본에 간다. 비행기를 타니 괜히 우쭐하다. ‘해외로 공연 보러 다니는 사람’이 된 느낌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오로지 공연 ‘케렌(’이었으니까. 취향 확실하고, 생활의 결이 풍성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 훗. 집중하자. ANA항공은 처음인데 기내식이 생각보다 유혹적이다. 공연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지만 배가 부풀어 있는 건 아니다. 서빙 트레이가 지나가는 동안 기내식의 촉촉하고 진한 소스 냄새가 뒤섞여 비행기 안에 차오른다. 소화가 안 될까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냄새로 유혹하니 버틸 수 없다. 든든히 먹어 두자. 상냥한 승무원에게 부탁해 커피도 두 번 리필해 마신다. 비행기 내려서 카페 찾기 귀찮으니까. 공항은 언제나 혼잡한 법.
그래도 표지판은 친절하다.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로도 같이 표기가 돼 있다. 과연 저 한글을 믿어도 되는가 싶은 의심이 드는 건 해외라면 어디서나 마찬가지겠지.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표지판만 보고 갈 수밖에 없다. 간사이공항역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쓰앵님, 제발 제대로 인도해 주십쇼. 잘 왔다. 공연장과 바로 연결되는 직통 노선인 JR하루카다. 허둥지둥 했던 게 멋쩍어질 정도로 공항 로비에서 몇 발짝만 걸으면 간사이공항역이다. 여러 전철 노선이 있지만, 파란색만 보면 된다. JR이 파란색이니까. JR의 직통 노선인 JR하루카와 일반 JR전철 노선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간사이 와이드 패스를 사자. 진짜 공연 ‘케렌’만 보러 온 짧은 일정이니 2일권이면 충분하다. 공연장은 오사카성에 있고, 오사카성은 오사카조코엔역에서 내리면 바로다. 간사이공항역에서 덴노지역으로 직통을 타고, 덴노지역에서 오사카조코엔역으로 가면 된다.
참치가 펄떡이네! 디지털 아트의 참맛
새로 만들어진 공연장이라더니 세련미가 흐른다. 오사카성 공원의 여유도 느껴지고, 공연장이 으레 그렇듯 우아미도 있다. 케렌의 오프닝 공연을 보러 온 전세계 인플루언서들의 멋짐도 뿜뿜. 공연장인 쿨 재팬 파크 오사카의 첫 공연 개시이기도 하고 공연 ‘케렌’의 오프닝이기도 해서 그런가 보다. 평면 전광판인 게 분명한데 입체감이 느껴진다. 무대 뒤편에 설치된 패널 말이다. 애니매이션의 한 장면인양 색깔이 쨍하게 울리고, 모션이 반복돼 눈을 붙잡고 놓질 않는다. 웅성웅성 객석의 말소리를 잠재운 건 주인공 닌자의 등장부터. 주인공이 현대의 오사카 밤거리에서 악당과 싸우다가 시간여행에 휘말린다. 휘리릭 빨려 들어간 곳은 옛날 교토의 대저택, 게이샤와 마이코가 그동안 갈고 닦은 노래와 춤을 뽐낸다. 목조 저택에는 단풍이 들었다가 소복히 눈이 내리기도 하고, 드디어 봄을 맞아 꽃이 만개한다.
눈물을 훔치려는 찰나 단막은 끝나고, 바지춤을 펄럭이는 사무라이가 등장. 칼을 뽑아 휘두르자 빽빽하던 대나무 숲이 민둥산이 된다. 프레임이 많은 수준 높은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공연자의 움직임에 맞춰 전광판의 디지털 아트가 한 치의 오차 없이 호응한다. 휘리릭 하자 후두둑. 완벽한 싱크로율! 흑과 적으로 구분된 두 닌자의 대결에서는 엉덩이가 들썩들썩 한다. 무대를 가득 채운 흑과 적이 밀고 밀리고, 먹고 먹히며 전투의 긴장감을 더한다. 마치 손오공과 베지터가 싸우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케렌이 다른 공연과 차별화된 특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는 ‘디지털 아트’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콘서트나 페스티벌에 가 봤다면 알 것이다. 노래하는 사람 뒤쪽으로 노래의 분위기를 담은 이미지가 재생된다. 바로 이것을 공연에 접목했다고 상상하면 된다. 태국에서, 베트남에서 보는 전통 공연처럼 자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내용인 것은 똑같으나 디지털 아트 덕분에 확실히 힙하다. 또렷하고 짜릿하다. 암, 21세기쯤 됐다면 여행자를 위한 문화 공연도 변화할 때가 됐지.
새로운 방식으로 일본의 문화를 보여 주고 싶어서 캐나다 기반의 비디오 콘텐츠 크리에이터 회사인 모멘트 팩토리와 협업했단다. 먼 대륙의 회사이지만 일본의 색이 아주 잘 녹아난다. 일본 특유의 만화적 상상력이 가미돼 옴니버스형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 같다. 그렇다고 디지털 아트만 도드라지는 것도 아니다. 영화 <킬빌>의 난투신 연출을 지도했던 시마구치 테프로, <자토이치>의 탭 댄스 안무를 맡았던 HIDEBOH 등이 참여하고 일본 방송계의 전설로 불린다는 다카히라 테츠요가 연출을 맡았다. 저명한 사람들이 참여했단 뜻이다. 그래서인지 구성과 퍼포먼스도 수준 높다. 무려 80분에 가까운 공연 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했으니 증명된 것 아닌가. 아이고 엉덩이야. 주인공 닌자가 악당과 싸워 이겨 다시 현대의 오사카로 돌아오는 것으로 케렌은 끝난다. 일본 요괴도, 스모선수도, 심지어 참치까지 일본의 아이콘을 다 봤다. 케렌만 봤는데 일본 여행을 다 한 기분이다. 오사카에 와야 할 이유가 하나 추가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