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LA에서 보낸 일주일

LA에서 보낸 일주일

'시간이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새로운 자극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읽은 이 법칙은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오늘이 처음인 것처럼 하루를 살았지만 내일을 사는 누군가가 자꾸만 시간을 당기는 것 같았다.

To Los Angeles
여행 모드로 전환

챙길까 말까. 집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고민했지 말이다. 수십 번을 망설이다 결국엔 무겁다며 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호텔이 위치한 베니스 비치는 달리기에 최적이었다. 평소보다 머리를 높이 질끈 묶고 조금은 과감하게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그런데 결정적으로 러닝화가 없다니. 11시간을 날아와서까지 하는 생각 치곤 꽤 옹졸하다만 낯선 곳으로의 적응기간이 필요한 법이다. 지금 여기 로스앤젤레스에. 하긴, 조깅을 하긴 밤낮으로 꽤 쌀쌀했다. 지구상의 도시라면 응당 앓는 기후 변화를 캘리포니아 역시 피해 가지 못한다던 인터넷 뉴스가 살갗을 스쳤다. 도통 쓸 일이 없던 우산을 가져 다니기도 한다니, 어쩜 ‘환상적인 날씨’는 더 이상 캘리포니아의 수식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로스앤젤레스에는 로스앤젤레스만의 ‘썸띵 스페셜’이 있다나. 로스앤젤레스관광청에서 근무 중인 알렉스(물론 그가 영국 남자라는 사실을 무시하지 못하지만)는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고, 늘 꿈꿀 수 있을 것 같은 도시”라는 말이 글쎄. 너무 예쁘장해서 로스앤젤레스 초행자를 위한 맞춤형 멘트가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그래도 새로운 시작, 여행자에게 이보다 솔깃하게 믿고 싶은 단어가 또 있나. 그것이 무엇이든 할지 말지 고민되는 상황이라면 일단 하고 보기로 마음먹었다. 평소 안 먹던 음식이나 매지 않던 연핑크 에코백, 타 본 적 없는 놀이기구 같은 것들도. 모처럼 완벽한 날씨에 그깟 러닝화가 없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Dreams Come True
베니스를 꿈꾸다

두려운 첫발을 뗐다. ‘띵동’. 앱을 다운 받아 QR 코드를 찍자 두 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자동차와 자전거만큼이나 현지인들이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이라더니, 정말로 골목마다 공유 스쿠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난생 처음 타 본 스쿠터의 속도 조절과 방향 턴이 난관이긴 했지만 다행히 해변은 유하게 이어졌다. 베니스 비치는 철저히 ‘개취’ 기반 인공 마을이다. 개인은 애봇 키니(Abbot Kinney, 1850~1920년), 취향은 이탈리아 베니스. 1800년대 후반 백만장자였던 애봇 키니는 그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베니스를 구현하고자 캘리포니아의 땅을 사들였다. 항구와 선상 레스토랑, 카페, 강당과 댄스홀을 짓고 운하를 만들어 곤돌라도 띄웠다. 마치 리조트처럼, 애봇 키니의 야심작은 1905년 공식 개장했다. ‘베니스 오브 아메리카’. 애봇 키니는 건축가, 화가 등 아티스트들을 베니스로 초대해 살게 했다고 한다. “백지에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해변에서 그래피티 작업이 한창인 아티스트들을 지나며 알렉스가 말했다. 때마침 일요일. 버스커와 행위예술가들이 기다렸다는 듯 오션 프론트 워크로 쏟아져 나왔다. 

해변 한쪽을 커다랗게 차지한 스케이트 파크에서는 스케이터들이 구경꾼들의 탄성을 리듬 삼아 공중과 땅을 번갈아 타고 있다. 베니스 비치는 오늘날 예술가들의 광장이 됐다. 애봇 키니가 그 옛날 그렸던 빅 픽처대로. 오션 프론트 워크를 벗어나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사람도 없겠다, 이제 좀 맘껏 밟아 볼까 하는데 왜 속도가 안 나는 걸까. ‘삐-삐-’. 곧 스쿠터 제한구역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부랴부랴 주차구역을 찾아 헤매다 가까스로 사태를 수습했다. 베니스 운하를 오롯이 두 발로 걸었다. 과거 10개 정도였던 운하는 지금 아주 일부만 남아 있었다.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면서 1929년부터 하나 둘 도로로 채워진 탓이다. 남은 운하들은 방치되다 1992년에야 리노베이션의 수혜를 입었다. 전성기를 훌쩍 넘긴 곤돌라들은 그대로 멈춰 있었다. 베니스 운하의 집 한 채가 무려 약 700만 달러에 호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어쩌면 쓸쓸함과 운치는 한 끗 차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게 도대체 얼마냐, 누가 저런 델 사나 등등 좀처럼 외딴 몽상을 하며 결국엔 차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시행착오가 많은 하루였지만 적어도 로스앤젤레스에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꿈, 도전, 창조, 우버가 워낙 일상인 도시기도 하다.

What a Gourmet City
인생이라는 찬사를 땅콩에 붙일 줄은

인 앤 아웃 버거라면 2년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이후 두 번째다. 아직 한국엔 없는 ‘미국 3대 버거’, 미 서부 여행에서 꼭 먹어 봐야 하는 음식으로 꼽히는 집이다. 가장 기본인 더블더블은 이미 먹어 봤으니, 이번엔 뭔가 색다른 걸로 시도해 보는 걸로. 메뉴판엔 없어 아는 사람만 시킨다는 ‘시크릿 메뉴’를 골랐다. 빵 대신 양상추로 패티를 덮은 ‘프로틴 스타일 버거’를 주문했는데, 음. 괜찮긴 하지만 자꾸만 다른 사람의 버거가 더 커 보이는 건 기분 탓인가. 미국 여행 3일차, 빵이 굳이 당기진 않아도 버거는 빵이다. 오리지널이 답이다. 오리지널 파머스 마켓에 도착한 건 순전히 타이밍이었다. 가볍고 개운한 음식이 절실해질 때쯤. 1934년 오픈 당시만 해도 파머스 마켓에 갈 목적은 장을 보기 위해서였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레스토랑이 대세다. 아시안, 중동, 지중해, 아프리칸 등 세계 음식들이 거대한 푸드코트처럼 모여 있다. 농산물 판매자가 아닌 레스토랑으로 처음으로 입점한 사례는 매기스 키친이다.

블란체 매기와 그의 남편 레이몬드가 파머스 마켓에 모인 농부들의 점심을 만든 게 시그니처 메뉴 콘비프 샌드위치의 시초다. 콘비프 샌드위치는 파머스 마켓을 넘어 로스앤젤레스에서 알아주는 음식이 됐다. 아무리 그래도 샌드위치는 무리일 것 같아서. 매콤한 메뉴를 탐색하던 중에 매기스의 또 다른 브랜드인 매기스 하우스 오브 넛츠를 발견했다. 가게 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잼 기계를 유독 신기해하자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잼 한 숟가락을 내미신다. 그 대상이 땅콩이 될 줄은 몰랐어도 가히 ‘인생’이라는 형용사를 붙여야 할 맛이다. 아몬드, 피칸 등 다른 잼도 맛보고는 오리지널 땅콩 잼 한 통을 집어 들었다. “Good Choice!” 블란체 매기의 아들의 아들의 아내 정도 된다는 아주머니는 내 결정에 연신 확신을 얹었다. 단 맛이 전혀 없이도 맛있는 잼이 있다는 것은 알게 됐지만, 인생이라는 찬사를 붙일 만큼 귀한 물건은 하나로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Happened  in  La  La  Land
라라랜드에서 부려 본 호기

“여기, 바로 여기요! 주인공들이 앉았던 그 자리에요.” 영화 <라라랜드>를 10번은 더 봤다는 일행에 의하면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세바스찬(라이언 고슬링 역)과 미아(엠마 스톤 역)의 데이트코스로 등장했다. 로컬 식재료, 레스토랑, 이벤트까지 한데 모인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다운타운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친숙한 장소다. 로스앤젤레스 그 어느 곳보다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꼽히기도 하는데, 에그슬럿(Eggslut, 미국), 차이니즈 카페(Chinese Cafe, 중국), 스티키 라이스(Sticky Rice, 태국), 라 토스타데리아(La Tostaderia, 페루). 맛집 리스트만 봐도 그렇다. 후에 영화를 다시 돌려 본 바, 미아와 세바스찬은 사리타스 푸푸세리아(Sarita’s Pupuseria, 엘살바도르)에서 저녁을 먹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1917년 개장 당시만 해도 로스앤젤레스 다운타운에서는 인종차별이 심했단다. 그랜드 센트럴 마켓은 맞은편에 있는 부촌, 벙커 힐에 사는 백인들만의 장소였고 상인들마저 백인에만 국한됐다고.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 낑낑대는 부자의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쇼핑을 마친 벙커 힐 주민들이 언덕 위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용했던 교통수단이 앤젤스 플라이트(Angels Flight)다.

마켓 데이트 장면은 희미하지만 <라라랜드>의 그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오렌지색 기차 안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키스를 하는 장면. 세계에서 가장 짧은 철도(90m)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기차는 너무도 금방 도착해 버렸다. 게다가 이렇게 덜컹거리기까지 하는데. 영화는 영화다. Where are we(우리 지금 어디쯤 있는 거지)? I don’t know. We are just gonna wait and see(몰라. 그냥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야). -영화 <라라랜드> 中 미아가 그날 치마만 입지 않았어도. 앤젤스 플라이트에서 내린 두 사람은 10분 정도 더 걸어 이곳에 올랐을 것이다. 전망대도 전망대지만 투명 미끄럼틀로 유명한 OUE 스카이스페이스는 로스앤젤레스에 왔다면 한 번쯤 부려 봐야 할 호기다. ‘띵’. 엘리베이터가 막상 70층에 다다르자 일행들이 머뭇대기 시작했다. “저요!”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났는지, 당차게 손을 들었다. 한 층을 시원하게 미끄러져 내려온 것도 모자라 너무 짧은 게 아니냐며 또 한 번 도시 위를 호탕하게 탔다. 미끄럼틀에 미세한 금이 가 있다는 둥 지인의 짓궂은 농담에 마음이 콩닥댔지만, 이미 다 지난 일인 것을. 내 목소리가 그렇게 큰 줄은 몰랐다는 후담을 들은 건 나중 일이다.

Behind  the  Scene
무대 뒤에서 벌어지는 일

애초에 오후를 싹 비웠다. 골프장이 딸린 리조트에 있을 법한 이 카트를 타기 위해서. 워너 브로스 스튜디오 투어는 <해리 포터>, <반지의 제왕>, <프렌즈> 등 수많은 영화와 TV 쇼를 제작한 워너 브로스의 세트장을 둘러보는 투어다. 카트 드라이버 겸 가이드가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시동을 걸었고, 그녀의 폭로는 2시간이 넘게 계속됐다. 보이고 들리는 대로 믿었으니 얼마나 순진했던가. <겨울왕국>에서 크리스토프가 설산을 오르던 소리는 누군가가 다리에 얼음을 달고 달리는 소리, <워킹데드>의 좀비가 내는 소리는 사실 크리스피 치킨을 먹는 소리였다니. <프렌즈>의 현실이 더 압권이었다. 주인공들이 종종 갔던 뉴욕 센트럴파크는 실제로 보니 삼각형 모양의 조그마한 잔디밭에 불과했다. “배우들이 이 잔디밭에 앉아 있는 클로즈업 샷과 실제 뉴욕 센트럴파크를 찍은 전체 샷을 이어 붙이는 거죠. 삼각형은 공간 활용의 문제인데, 촬영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화면에서는 사각형으로 비칠 수 있어요.” 몇 시즌을 속았다.

두터웠던 환상들이 한 겹씩 뜯어져 나가는 기분이었지만, 낱낱이 드러나는 실상들이 오히려 영화처럼 느껴졌다. 사운드 스테이지(Sound Stage, 철벽 방음 시스템 덕에 붙여진 이름)라고 불리는 독립된 건물 안에 들어섰을 땐 영락없는 경찰서의 모습이었다. 형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디텍티브스> 촬영이 진행 중이라 사무실뿐만 아니라 취조실, 부검실까지 꾸려져 있었다. “40분 분량의 에피소드를 한 편 만드는 데 8~10일이 걸려요. 보는 사람의 단 한 장면을 위해 찍는 사람은 같은 장면을 다른 각도로 반복해 찍어야 하니까요.” 카메라 빛 반사를 막으려 창문을 특수 제작하고 벽을 세우고 허무는 일은 스테이지에서 일도 아니다. 카트를 타고 시작점으로 되돌아가는 길. “세트로 쓰이는 건물은 대부분 본래의 기능을 해요. 박물관 안 여자 화장실까지도(웃음).” 소방서를 지나는 이 시점에 호접지몽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영화와 현실의 차이에 있어 아주 뜬금없는 개념도 아니거니와 꿈에서 헤어 나오기까지가 고됐던 것이다. 아주 잠깐 졸았다.

becoming  A  Star
할리우드 스타를 향한 길

로스앤젤레스에서 등산을 한 이유는 단순하다. ‘HOLLYWOOD’ 사인에 가까워지고 싶어서. 할리우드에 입성하는 일은 녹록치가 않았다. 그리피스 공원의 한 구역인 마운틴 할리우드 트레일은 가파르지 않은 듯하면서도 가팔랐다. 흐리한 하늘에 안개까지 자옥한 오후는 장르로 치면 멜랑꼴리한 멜로에 가까웠다. 곁에 있지만 곁에 있지 않은 듯. 로스앤젤레스 도시의 전경은 산등성이에 폭 숨었다가도 가끔은 있는 모든 것을 보여 줄 것처럼 굴었다. 2시간의 하이킹 끝에 도착한 곳은 그리피스 천문대. 천문학에 각별한 관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핑크빛 노을을 보기 위한 마무리 일정이었다. 그리피스라는 분께는 좀 죄송한 말이긴 하다. 세상 모든 이들이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그는 로스앤젤레스시에 사유지를 기부했고, 천문대는 1935년 오픈 이후 지금까지 무료로 열려 있다.

일기예보에 의하면 해가 질 때까지는 15분 정도 남았다. 천문대 안에 있는 ‘푸코의 추’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천장에서부터 매달린 추가 왔다 갔다 움직임을 반복하며 지구의 자전을 증명한다는 원리는 여전히 어렵지만 7분마다 쓰러지는 핀을 보고 있는 시간은 이상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다 기다리던 7분이 됐는데 어라? 핀이 넘어지다 말았다. 도통 이런 일이 없다는데. 다음 핀은 납작 엎드렸으므로. 찜찜함은 여운이라는 더 괜찮은 감정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별과의 교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기대했던 핑크는 아니고 새빨갛게. 아쉬운 맘인지 뭔지, 산불이 난 것 같다며 그만 실없는 농담을 내뱉고야 말았다. 온 반나절을 함께했으니 이제 적응할 때도 되지 않았나. 지금 생각하면 할리우드식 유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