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미식체험
안동의 전통을 맛보다
낡은 기와지붕에 이름 모를 풀들이 색을 더하고, 활짝 열어놓은 장지문으로 호수바람이 흘러들어온다. 대청마루에 앉아 고택의 고즈넉한 분위기와 단정하게 차려진 안동의 맛에 취해본다.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가치를 더해가는 역사와 전통의 맛.
수졸당 守拙堂
화려함보다 우아함, 건진국수
하계리의 작은 마을에 자리한 수졸당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으로,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용도李詠道 선생이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수졸당에 당도하자마자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1m가 넘는 홍두깨로 반죽을 미는 윤은숙 종부의 모습. 그녀가 만들고 있던 것은 안동국시의 면 반죽으로, 건져서 만드는 국수라고해서 건진국수라고도 부른다. '밀가루에 콩가루를 1/3 비율로 섞어서 반죽을 만들고 두 시간 이상 숙성해요. 이렇게 만들면 맛이 구수하고 면이 차집니다.' 반죽 아래로 글자가 비쳐 보일만큼 얇게 밀고 나면 칼로 썰 차례. 얇고 길수록 안동 건진국수의 맛을 제대로 재현할 수 있다고 한다. 직접 칼을 쥐고 면을 썰어보는 사람이 있었지만 얇게 썰기는 쉽지 않은 일. 면을 소쿠리에 담아 뒷마당으로 이동하는 종부를 따라갔다.
솥에서 팔팔 끊고 있는 뜨거운 물에 거침없이 면을 넣는다. 수졸당의 며느리가 마른 짚을 가져와 불을 떼고, 뜨거운 연기가 무섭게 퍼지는데도 종부는 익숙한 듯 긴 젓가락으로 면을 휘젓는다. 어느 정도 면이 익었을 때 솥에 바로 찬물을 넣어 물의 온도를 낮춘다. 그 다음 면을 건져 미리 준비해둔 차가운 물에 바로 식힌다. 이렇게 해야 면발이 쫄깃하다고. 찬물에 헹궈낸 면에 은어와 닭 또는 소고기를 우려서 만든 육수를 자작하게 붓고, 다진 고기와 달걀지단, 그리고 호박 고명과 깨까지 올린다. 완성된 건진국수가 나물반찬 등과 함께 한 상에 차려진다.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면발에 담백한 육수의 맛은 화려하보다는 우아함 그 자체다. 면을 비우고 나면 밥을 말아서 먹기도 하는데, 의외로 속이 든든하다. 맛 자체가 튀지 않기 때문에 한없이 먹을 수 있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까. 한 그릇 싹 비운 뒤에도 입안이 개운하다.
차암고택 恥巖古宅
차 한잔의 여유, 전통다과
차암고택은 안동 시내와 인접해 있지만 주변이 조용하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길에 기와지붕이 얹힌 개집이 눈에 띈다. 고택이 많은 안동답다고 할까. 그 앞에 서 있는 개도 선비처럼 얌전해 보인다. 이곳은 퇴계 이황의 11대손 치암恥巖 이만현李晩鉉 선생의 집이다. 본래 도산면 원촌리에 터를 잡고 있었지만 안동댐 수몰 지역으로 지정되며 197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터를 옮겼지만 고택의 분위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대문을 넘어가면 단번에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 온 기분이 든다. 푸르게 깔린 잔디를 지나 대청마루로 올라선다. 치암고택의 종부가 준비한 다과상이 놓여 있다.
예쁜 모양새로 담긴 수박과 쑥 인절미, 송화다식, 전약 등이 동양화의 수간채색처럼 곱다. 그와 함께 노란 꽃잎이 활짝 핀 국화차의 은은한 향까지. 종부가 직접 만들었다는 다식들은 요즘 과자와 다르게 단맛이 적다. 그 중 양갱이와 비슷한 모양새인 전약은 궁중요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 다음으로 가장 오래된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요리서에 적힌 방법으로 만들었다. 오로지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종부의 미소에 완연하다. 팥을 사용하는 양갱이와 달리 전약은 대추를 갈아서 약초, 꿀, 생강을 넣어 만든다고 한다. 뒷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조용한 고택의 풍경이 차담 시간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준다.
수애당 水涯堂
유쾌한 한 상, 헛제삿밥
해 질 무렵 임하호를 마주한 수애당을 찾았다. 노을이 아름답게 지는 이곳은 수애水涯 유진걸柳震杰 선생이 건립한 사가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된 고택이다. 수애당 역시 임하댐 건설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허기진 여행자에게 수애당의 문정현 종부가 내어준 것은 안동에서도 유명한 헛제삿밥. 헛제삿밥은 평상시에는 제삿밥을 먹지 못하니 제사 음식과 같은 재료로 비빔밥을 만들어 먹은 것에서 유래되었지만, 사실은 밥과 음식이 부족했던 조선 시대에 거짓으로 제사를 열어 제사 음식을 즐겼다고도 한다. 반상에는 나물, 전, 고기, 탕국과 흰밥이 놓여있다.
일반 제사상에 올라오는 기본적인 음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왜 '헛'제삿밥이라고 하는지 상차림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독특한 점은 콩나물, 고사리 등의 나물이 담긴 놋그릇에 국수면도 함께 들어 있는 것. 안동에서는 제사 때 꼭 국수를 만드는데, 망자가 먼 길을 갈 때 국수를 어깨에 메고 긴 여정을 천천히 먹으면서 가라는 의미란다. 먹는 법도 따로 있다. 국수와 나물, 밥을 탕국과 함께 비빈다. 집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배추전, 두부전, 돔베고기와 고등어구이 등을 반찬으로 먹는다. 차려진 음식이 간단해 보이지만 의외로 속이 든든해지고, 기와지붕 너머로 붉게 물든 하늘이 보인다. 수애당이 선사하는 멋진 선물이 아닐까.
정재종택 定齋宗宅
100일의 정성, 송화주
대문 너머로 보이는 임하 호의 푸른 모습이 인상적인 이곳, 정재종택은 퇴계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선생의 종택이다. 능소화색의 치마저고리에 앞치마를 두른 김영한 종부가 환한 미소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너른 앞마당을 지나 사랑채로 올라서자 교자상에 놓여있는 술잔이 보인다. 밥도 먹고, 차도 한잔했으니 이제는 술을 마실 차례. 고대하고 기대하던 순간이다. 정재종택은 다른 무엇보다 ‘송화주松花酒’가 유명하다.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300~400여 년 전부터 제사상에 올리기 위해 빋어온 술이란다.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귀하다.
찹쌀과 멥쌀, 국화와 솔잎으로 만든 송화주는 100일이 지나야 맛과 향이 제대로 올라온다. 청주 특유의 맑은 색과 잔에 따르는 순간 올라오는 향긋한 솔향. 과하게 달지도 독하지도 않고 그윽하다. '송화주는 피를 맑게 하는 약주였기 때문에 조상님들은 아침 반주로도 많이 드셨죠.' 술과 함께 내어준 안주는 종부가 직접 만든 육포와 견과류, 대추. 기름기 있는 육포와 위장을 보호해주는 견과류는 이곳에서 주로 즐기는 안주라고 한다. 뒤이어 한국의 전통 포도주와 막걸리도 맛봤다. 청주에 포도가루를 넣어 만든 한국식 포도주는 생포도 맛이 진한 막걸리로, 흔히 생각하는 와인과는 색과 맛이 전혀 다르다. 막걸리 또한 닷맛이 거의 없고 신맛이 돋보이는 전통 막걸리 맛. 거하게 '부어라 마셔라'가 아닌 술 자체의 맛과 향을 즐겨보는 이곳, 정재고택에서의 시간.
구름에 리조트
고추장 만들기 체험
월영교를 지나 안동민속촌으로 올라가면 산에 포근하게 안겨있는 듯 고요히 자리를 잡은 구름에리조트를 만날 수 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들어서면 최근에 지은 듯 밝은 빛깔의 한옥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한옥으로 새로 지은 리조트라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일곱 채의 고택이 나타난다. 이곳에 모여 있는 고택들은 모두 안동댐이 건설되면서 물에 잠기게 되어 여기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박산정, 청옹정, 감동재사, 팔회당재사, 계남고택, 서운정, 칠곡고택까지 일곱 채가 모여 구름에리조트의 숙박시설이 되었다. 전통과 현대의 만남을 온전히 느길 수 있는 기묘한 이곳. 구름에리조트에서는 숙박은 물론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한복 체험, 가양주 담그기 체험, 전통방식으로 고추장 만들기 체험 등. 그중 고추장 만들기는 아이들도 쉽게 따라 할 수 있고, 만든 고추장은 집으로 가져가 바로 먹을 수 있어서 인기라고 한다. 체험관에서 메줏가루와 고춧가루, 조청, 굵은 소금과 식혜 등을 준비해준다. 앞치마를 메고 레시피에 맞춰 한데 섞은 뒤 담아내면 완성이다.
칠계재 七戒齋
종부의 양반도시락
칠계재는 조선 후기 장세규張世奎가 건립한 고택으로 앞서 방문했던 고택들만큼이나 종부의 손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아쉽게도 시간이 부족해 고택을 방문하지는 못했지만 칠계재의 종부의 양반도시락은 맛볼 수 있었다. 구름에리조트 강당, 창호지를 뚫고 들어온 햇빛 아래로 고운 빛깔의 천에 싸인 도시락이 준비되었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끈으로 묶고 생화로 장식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시락을 열기 아까워진다. 10가지 종류의 찬과 탕국, 간장과 나물밥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다. 시래기밥과 마밥, 호박전, 가지전, 쇠고기장볶음, 박나물, 삼색 북어보푸라기, 오디 연근조림, 메밀나물과 붉은돔 조림까지. 도시락의 메뉴와 재료 대부분이 엣날부터 안동에서 주로 먹던 것이라고 한다. 도시락을 구성하는 모든 반찬과 밥이 마치 하나의 요리처럼 정성이 가득하다. 눈으로 한 번, 입으로 한 번. 칠계재의 고택을 상상해본다.
EDITOR'S PICK PLACE
안동의 보물들
하회마을
안동을 대표하는 명소인 하회마을은 물이 돌아나간다고 해서 우리말로 '물동이동'이라고 하고, 한자로는 '하회河回’라고 이름을 붙였다. 초가지붕, 기와지붕을 얹은 가옥들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길은 포장되지 않은 그대로여서 바람이 불 때마다 모래가 사뿐 올라온다. 색이 바랜 기와지붕의 위에는 이름 모를 잡풀이 자라있고, 담벼락 틈에도 꽃이 활짝 피어있다. 그저 이 마을을 걷고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하회마을이 주는 분위기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하회마을을 전부 둘러보기 위해서는 이틀이 꼬박 걸린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 하동고택, 북촌댁, 남촌댁 등이 잘 알려져 있다.
도산서원
천 원 권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도산서원. 안동호를 마주보고 있는 도산서원의 입구 오른쪽에는 '열정冽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다. '아무리 퍼내도 넘치지 않는 우물처럼, 지식은 아무리 쌓아도 넘치지 않으니 열심히 공부하여 타인을 위해 지식을 쓰라'라는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이 이 우물에 담겨있다. 우리나라 대표 유학자인 퇴계 이황 선생은 도산서당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뒤편으로 서당을 확장시켜 도산서원을 건립했다. 서당 시절의 건물은 3칸밖에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남향 건물들로, 가장 아래쪽에 있는 건물이라고 보면 된다.
병산서원
도산서원만큼이나 유명한 이곳 병산서원은 '병신'이라 불리는 돌산을 마주보고 있다. 하회마을에서 차로 약 1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퇴계 이황의 제자였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이 배향되었다. 서원 입구를 지나면 대문 바로 앞 계단에 지어진 만대루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병산의 승경이 워낙 빼어나 공부를 하지 못하고 풍경만 바라보는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총 7칸으로 나누어진 만대루는 마치 7폭의 병풍 속에 눈 앞의 풍경을 집어넣은 듯하다. 병산서원을 방문한 여행자들 대부분은 시원한 산바람을 맞으며 만대루에 앉아 한없이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월영교
1998년도 안동에서 택지 개발이 한참 일어날 즈음 무덤 하나가 발견됐다. 그곳에서 나온 것은 모발이 그대로 남아 있는 미라와 편지, 그리고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모시와 짚을 엮어 만든 고급 신. 편지에는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내의 마음이 적혀 있었으며, 미투리는 짚이 썩어 없어지고 머리카락만 남은 상태였다. 미라가 발견되고 5년 뒤에 안동에 이 월영교가 세워졌다. 국내에서 가장 긴 목책인도교로 미투리의 형상으로 디자인했으며, 연인이 손을 잡고 다리 끝까지 걸어가면 이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교문화박물관
국내에서 유일하게 유교에 관한 다양한 전시가 열리는 박물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약 6만 3천여 점의 유교책판을 보유하고 있다. 안동의 유서 깊은 집안이 가지고 있었던 목판들을 모은 것으로 목판을 통해 과거 안동 양반들의 삶과 문화를 알 수 있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았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의 역사가 새겨져 있어 발견 당시 큰 이슈가 된 1m짜리 대형 목판도 있다. 관람에 앞서 1층 영상실에서 9분짜리 홍보 영상을 감상한 뒤 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