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와인 향을 따라가는 여행 MORAVIA

와인 향을 따라가는 여행
MORAVIA

들판을 가득 메운 포도밭에 성모마리아를 닮은 조각상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다. '이 땅을 지켜주세요'라고 적힌 석판 앞에는 포도밭 주인들이 가져다 놓은 꽃들이 소복하다. 와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 체코의 남부 모라비아에서 짙은 와인 향에 취해본다. 체코하면 맥주를 연상하듯, 모라비아에서는 와인을 빼놓을 수가 없다. 프라하에서 3시간 거리에 위치한 모라비아의 너른 평야는 대부분 포도밭으로 가득하다. 이 포도밭에서 체코와인의 96% 이상이 생산되고 있다. 모라비아 사람들은 집 마당에서 포도나무를 키우고 와인을 직접 담가 마신다. 손님이 집에 오면 차를 대접하는 대신 “레드와인 드실래요? 화이트와인 드실래요?”라고 물을 정도이니 그들이 얼마나 와인을 사랑하는지, 그들의 일상 속으로 와인이 얼마나 깊이 들어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와인의 향기가 넘실대는 모라비아의 마을에는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가득하고, 중세의 멋과 와인의 역사를 담은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어서 여행자를 기다린다.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체코와 마주하는 시간. 한 잔의 와인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과 체코의 전통을 만나기 위해 남부 모라비아로 떠난다.

미쿨로프 MIKULOV

모라비아의 가장 남쪽, 유네스코가 지정한 생태보호구역 팔라바Palava 와인농장 한가운데 언덕에 위치한 작은 마을 미쿨로프는 주변 경치와 마을 풍경이 워낙 아름다워 체코의 시인 얀 스카첼은 이 마을을 '신이 준 모라비아의 이탈리아'라 칭했다. 3세기 로마시대부터 와인을 제조해왔으며, 매년 모라비아의 인기 축제 중 하나인 미쿨로프 와인 페스티벌이 열린다. 남부 모라비아의 여러 도시들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어 주변 도시를 여행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로 좋은 곳이다. 와인을 사랑하는 이라면 놓쳐서는 안 될 미쿨로프의 와인 축제. 매년 9월 둘째주 금, 토, 일 3일간 펼쳐지며 그해 최고의 와인과 그해 만들어진 첫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다채로운 문화행사와 미식행사 등으로 축제만 되면 미쿨로프는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언덕 위의 고성, 미쿨로프 성
ZÁMEK MIKULOV

마을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 보이는 것은 도시 한가운데에 우뚝 선 옅은 살구색 성이다. 마을의 랜드마크인 직사각형 건물이 어긋나듯 층층이 쌓인 형태의 미쿨로프 성은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고성 중에서도 독특한 화려함을 자랑한다. 미쿨로프 마을 광장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바로 성의 정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 정원은 거대한 성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지만 빈틈없이 섬세하게 가꿔놓았다. 정원 반대편에는 성벽 너머로 마을 풍경이 펼쳐진다. 체코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붉은 지붕의 모습이 평화롭다. 성 내부는 미쿨로프 역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주기적으로 와인 관련 전시회도 열린다.

상당의 숨겨진 모습,
지하 저장고

미쿨로프 성 지하 저장고에는 중부 유럽에서 가장 큰 오크통이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이 오크통은 지름 5.2미터, 길이 6.2미터, 무게 약 26톤으로 총 10만 1천 리터의 와인을 저장할 수 있다. 천장에 닿을 듯한 거대한 크기와 오크통에 새겨진 화려한 장식만으로도 단순히 와인을 보관하는 통 이상의 가치가 느껴진다. 이 지하 저장고는 과거 영주가 포도 농장주에게 세금처럼 와인을 걷던 장소, 농장주는 매년 전체 와인 생산량의 1/10을 영주에게 지급해야 했고, 영주는 세금으로 걷은 와인을 이 거대한 오크통에 넣고 섞어서 마셨다고 한다. 이후, 수확량이 대폭 줄면서 오크통은 유흥거리로 전락했다. 영주가 와인을 마실 때 악사들에게 오크통 안으로 들어가 연주를 하도록 시켰다고. 음악이 가득 울리는 지하에서 와인을 마시는 영주의 모습이 어쩐지 눈에 선하다. 저장고 옆에는 포도를 착즙하는 압축가와 와인을 만들 때 사용하는 다양한 관련기구들을 전시하고 있으니 함께 둘러보면 좋다.

성당의 숨겨진 모습,
디트리히슈타인의 무덤
DIETRICHSTEINSKÁ HROBKA

미쿨로프 광장 앞 오래된 성당 건물. 이곳은 소수의 인원만 입장 가능하기 때문에 사전예약을 해야 한다. 당연히 성당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이지만 사실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의 무덤으로 내부에는 시신 약 40여 구가 안치되어 있다. 무덤이라는 말을 듣고 보니 내부가 상당히 을씨년스럽다. 입구로 사용되는 첨탑 안의 계단을 올라가면 미쿨로프와 디트리히슈타인 가문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전시관이 있다. 석상이나 옷가지 등의 일반적인 전시품 외에도 디트리히슈타인 귀족의 심장을 담아놓은 함과 같은 이색적인 전시품도 보관 중이다.

언덕 위의 하얀 성당,
스바티 코페첵
SVATÝ KOPECEK

언덕 위 하얀 예배당. 영어로는 ‘성스러운 언덕Holly Hill’ 또는 체코어로 ‘스바티 코페첵Svatý Kope?ek’으로 불리는 이 언덕을 오르는 데에는 약 20~30분 정도 소요된다. 돌 때문에 지면이 울퉁불퉁하고 나무가 우거져 주위가 잘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파란 화살표가 정상까지 길을 안내해준다. 언덕까지 올라가는 길에 예수의 마지막 여정을 묘사한 동상 15개가 설치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 길을 ‘십자가의 길K?í?ová cesta’이라고도 부른다.

유쾌한 와이너리,
포드 코짐 흐라드켐
POD KOZÍM HRÁDKEM

웅장한 바위 아래 붙어있는 '포드 코짐 흐라드켐'은 미쿨로프에서 가장 이색적인 와인셀러를 보유한 와이너리다. 체코 전통 음악을 들으며 남부 모라비아의 가정식과 와인을 즐길 수 있다. 식사를 마치면 석회암으로 둘러싸인 와인셀러 동굴에서 여러 종류의 화이트와인과 레드와인을 테이스팅 하며 와이너리 주인장에게 와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이웃집 아저씨처럼 유쾌한 주인장의 이야기는 마치 농담처럼 정겹다. 이곳의 와인은 모두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향이 풍부하게 올라오는 것이 특징. 딱딱하고 형식적인 와이너리가 아닌, 먹고 마시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선사하는 포드 코짐 흐라드켐, 예약은 필수다.

태양이 비치는 언덕, 손베르크
SONBERK

팔라바 포도밭 한 가운데에 와인 제조 공장을 보유하고 있는 손베르크 와이너리. 모라비아 지역은 대부분 포도밭 농장과 제조 공장이 따로 떨어져 있지만 손베르크는 포도밭과 공장이 함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태양이 비치는 언덕'이라는 뜻의 손베르크의 포도밭은 말 그대로 동쪽에서부터 서쪽까지 햇볕을 고루 받는다. 와인 한 모금과 함께 준비해준 빵과 치즈를 맛보고, 창밖으로 드넓은 포도밭 풍경과 필라바 언덕을 감상할 수 있으니 이만한 호사가 또 어디 있을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기 어려운 위치에 있어 예약 후 개인적으로 교통편을 마련해 찾아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모라비아의 두 번째 도시
즈노이모 ZNOJMO

미쿨로프의 서쪽에 위치한 즈노이모는 모라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체코의 3대 와인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9세기부터 역사가 시작된 즈노이모에는 다양한 문화재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도시 옆을 흐르는 디에Deya강과 르네상스풍의 동화 같은 도시 풍경이 고즈넉하게 펼쳐진다. 과거 300여 년 간 오형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정 도시로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실제로 도시 곳곳에는 독일어 간판을 건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하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득했지만 오히려 그 흐린 날씨가 중세 분위기의 멋을 더해주는 곳이다.

중세도시 산책,
구 역사지구 골목길

즈노이모의 옛 역사지구를 걷는 골목길은 유럽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가득하다. 최근 새롭게 정비해서인지 거리는 깔끔하고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 해 질 무렵의 햇빛과 비슷한 색감의 건물들은 예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며 조노이모만의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좁고 울퉁불퉁한 바닥과 넝쿨이 늘어선 벽면, 꽃으로 장식된 창문은 끊임없이 셔터를 누르게 만든다. 뷰 파인더에서 보이는 세상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여행자에게 추억 될 만 하다.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지도를 잠시 내려두고 그저 가고싶은 길로 걸으며 잠깐 길을 잃어버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골목길.

두 나라의 화합,
구 시청사 타워

즈노이모 구 역사지구를 걷다 보면 청동색 지붕의 시계탑이 보인다. 15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구 시청사의 타워로 즈노이모라는 곳이 어떤 도시인지 알 수 있는 상징과도 같다. 청동색의 지붕은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어긋난 사각형으로 건축되었는데, 즈노이모에 살고 있는 오스트리아 사람과 모라비아 사람을 의미한다. 두 나라의 동거는 19세기까지만 이어졌지만, 그럼에도 이 타워를 보면 그들이 서로를 인정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구 시청사 건물 입구에서도 즈노이모와 모라비아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문양이 남아 있다. 구 시창사 타워의 입장료는 35코루나한화 약 1,700원이며, 탑 정상에 올라가면 도시 전망이 한눈에 들어온다.

즈노이모의 숨은 지하터널
ZNOJEMSKÉ PODZEMÍ

16세기에 지어진 르네상스 풍의 아름다운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벽면 한 쪽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띈다. 철문으로 가로막혀있는 계단 아래에서 어두컴컴한 터널의 입구가 보인다. 중세시대에 만들어진 이 지하터널은 지하도시라고도 불렸다. 즈노이모 도시 곳곳의 저장고들을 연결한 터널이며 그 길이가 약 30킬로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이곳은 도시의 상신들이 주로 이용했는데, 각각의 저장고에는 와인을 비롯한 다양한 물건들이 보관되었다. 현재는 저장고 역할은 하지 않고 관광지로 이용되고 있으며, 직접 터널을 둘러볼 수 있지만 길이 좁고 천장이 낮아 이동이 불편하니 참고할 것.

오스트리아와 체코를 이어주는 풍경, 성벽 전망대

구 역사지구 길을 따라 강변까지 쭉 걷다보면 다다르는 성당 앞 성벽 전망대. 성 니콜리스 성당과 마주보고 있는 '소 산'과 디에강의 풍경이 두 눈 가득 차고 넘친다. 이 강을 따라 10킬로미터만 올라가면 오스트리아 국경에 닿을 수 있다고 하니, 두 나라가 얼마나 가까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전망대에서 왼편으로 모라비아 지역에서 가장 크고 높은 철로가 강 건너편을 이어준다. 베를린, 프라하, 비엔나를 연결해주며 즈노이모를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어준 그 철로일 것이다. 소들이 풀을 뜯으며 다닌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소 산'에는 즈노이모 사람들이 텃밭을 가꿀 때만 이용하는 농장용 가옥이 장난감 집처럼 콕콕 박혀 있다. 도시의 삶 속에서 한번쯤 꿈꿔왔던 풍경이 그곳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즈노이모를 수호하는
성 니콜라스 성당

여느 도시에도 성당은 있지만 제각각 풍기는 분위기는 천차만별이다. 이른 시간에 방문한 빛바랜 살구색의 거대한 성 니콜라스 성당의 내부는 건물 외관에 비해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성당의 건물은 후기 고딕양식, 내부의 장식품은 바로크양식으로 만들어졌다. 2층에 있는 짙은 회색의 파이프 오르간은 19세기에 제작된 네오고딕 양식. 세 가지의 양식이 함께 뒤섞인 묘한 성당이다. 그럼에도 무엇 하나 튀지 않고 저마다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모습이 신비롭다. 예배당 맞은편에는 17세기에 교황이 선물로 주었다는 즈노이모 수호성인, 성 보니바츠의관이 전시되어 있다. 투명한 관 너머로 금속으로 장식된 시신의 모습이 화려하게 누워있다.

로제의 왕, 비노 호트
VINO HORT

즈노이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비노 호트 와이너리. 색색의 저장고들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귀엽다. 이 와이너리에서는 체코의 가정식과 함께 와인을 맛볼 수 있다. 비노 호트의 와인은 프랑스 포도밭에서 키운 체코 품종의 포도로 생산되어 보통의 모라비아 와인과는 조금 다르다. 굳이 말하자면 프랑스에서 키워서 체코에서 만든 와인이라 할 수 있다. 주인장이 단맛을 좋아하지 않아 대부분의 와인은 산도가 높은 편이며 제공되는 식사와 함께 마시면 입안이 개운해져 좋다. 특히 비노호트의 로제와인은 ‘무관의 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독보적인 향과 맛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