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다른 여행
단양
애닯고 서럽다.
그리고 깊고 그윽하며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조심스레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구구절절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단양.
그런 단양을 조금은 마음을 내려놓고 막 가을이 시작될 때 다녀왔다.
흔히 듣곤 하는 한자는 아니지만 단양의 지명은 연단조양 鍊丹調陽 이라는 사자성어에서 유래되었다. ‘연단’은 신선이 먹는 환약을
뜻하고, ‘조양’은 빛을 골고루 따뜻하게 비춘다는 의미로, 그래서 단양은 ‘신선이 다스리는 아름다운 땅’으로 이름 지어진다.
한문은 다르지만, 한글 양자는 원래 남북을 대표하는 두 지역, 즉 한양이나 평양 같은 곳에 쓰이는 아주 귀한 글자였지만 이 한반도
한 가운데의 땅인 이곳에도 부여된 바, 분명 단양은 예사로운 땅이 아닐 터이다. 단양은 백두대간에서 태어난 오대산 줄기와 소백산
줄기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그러니까 두 커다란 산맥이 만나는 곳인 까닭에 산세가 깊고 곳곳에 유달리 기암괴석들이 많다. 많은
사람들이 단양8경으로 소문난이 절경들을 보러 오지만 지천이 가을빛으로 물든 단양에서는 조금 다른 것들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
그리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돌이켜보니 그런 단양은 조금은 달랐다
정도전과 도담상봉
전국의 각 지역마다 8경이나 5경, 10경처럼 빼어난 볼거리들을 두고 이름을 붙이곤 하는데 단양 8경은 강원도의 관동 8경과 더불어
아무래도 그중 으뜸에 속하지않을까 싶다. 어떤 것이 앞서고 또 무엇이 뒤에 서는지는 중요하지 않지만 그래도 8경 중에 가장 익숙한
장면이 있다면 제7경인 도담삼봉이 먼저 떠오른다. 남한강이 참으로 단정하게 흐르는 가운데 세 개의 단아한 봉우리가 떠 있는 모습은,
작은 것도 실로 아름답다면 충분히 장관을 이룰 수 있다는 작은 철학마저 느끼게 한다. 삼봉은 봉우리 세 개가 있어서 삼봉三峰이요
또 섬이 있는 물이므로 도담嶋潭이라 일컫는다. 이 세 봉우리는 그 옛날 강원도 정선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떠내려 왔다는 전설이 있어
신비감을 더한다.이 도담삼봉에는 주목할만한 한 인물이 언급된다. 그 이름은 정도전. 정도전이라는 이름 석자는 알려진 바보다
훨씬 더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하는데 대한민국 이전에 조선이 있었고 그 조선의 반석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나라의 향방을 결정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가재정을 총괄했던, 그야말로 조선 최고의
설계자였다. 왕의 거처인 경복궁이 바로 그의 작품으로 정도전은 경복궁 건축을 총 지휘하고 현판까지 작명했다. 경북 봉화사람이지만
외가인 단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정도전은 자신의 호인 삼봉을 이곳에서 취할 정도로 도담삼봉의 풍광을 사랑했으며, 이황을 비롯해
토정이지함과 김홍도, 김정희와 정선, 정철 등 실로 조선을 대표했던 전설적인 인물들이 이 먼 곳까지 찾아와 글과 그림으로 남겨
놓을 정도로 한반도 절경 중의 절경을 대표한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사진 스폿이기도 한 이곳에서는 계절에 따라 숨 막히는 일출과 일몰
을 그림같이 빚어낼 수도 있어 절경의 의미를 한층 더하며, 강가로 내려오면 배를 타고 강을 따라 유람하는 선상관광을 즐길 수도 있다.
도담삼봉을 보고 난 후라면 실로 벅찬 마음까지 들 정도로 커다란 보석상자 같은 단양. 참으로 구석구석에 보석을 많이도 숨겨 놓은
곳이다. 도담삼봉에서 왼쪽 언덕 위에 있는 이향정을 지나 30분 정도 산길을 걷다보면 나오는 또 다른 단양 8경 중 한 곳. 석회암이
오랜 시간 동안 풍화되어 암석의 형태가 마치 돌로 만든 문과 같다고 해서 석문이라 불린다.
천태종의 총본산. 구인사
전국적으로 말사를 140여 개나 거느리고 있는 구인사는 한국 불교를 양분하고 있는 분파인 천태종의 본산이다. 소백산 제4봉인 수
리봉 아래 연꽃 지형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동시에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5층 대법당은 전국 최대 규모이다. 천태종의 역사는 고
려 숙종 2년 때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구인사 창건은 그리 멀지 않은 1945년이라 사찰 특유의 고졸하고 고풍스러운 맛은 덜한 편이
다. 하지만 구인사는 다른 사찰들과 달리 산 속의 암중에 거처하고 있지 않고 단양 시내와 가까운 곳에 자리해 오히려 생활 속에 자
비를 실현하는 생활실천 불교를 지향하는 천태종의 불교철학에 좀 더 순수하고 솔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무려 50여 채의
건물이 있는 엄청난 크기의 구인사 현대식 경내는 그다지 거부감이 없고 의도적인 엄숙함이 많이 누그러져 있다.
사찰의 입구까지 오르는 길은 다소 가파르고 다시 구인사를 대표하는 대조사전에 이르기까지 꽤 오랜 걸음을 해야 하지만 구인사의,
소위 정상에 다다라 금빛 대조사전을 마주할 때는 마치 김제의 금산사 미륵전을 보는 것 같이 감탄스럽다. 구인사를 처음 와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 곳에서 적잖은 탄성을 내뱉을 것이다. 때마침 산 아래로 흘러 내려가는 듯한 경내를 굽어보니 어느새 산속의
바람이 마침 소백산 끝자락을 휘감고 지난다. 언제나 깨어있으라는 찬불가마저 이 품격의 구인사에 보이지 않는 풍경을 더한다.
온달의 모든 것. 온달 관광지
구인사에서 나와 다시 단양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숨쉬는 온달관광지가 나온다. 동네 바보에서
한 나라의 장수에 이르기까지 극적인 삶을 살고 어여쁜 평강공주를 부인으로 맞은 로맨스의 주인공 온달을 테마로 한 이곳에는
무려 3만여 평의 부지에 온달세트장과 삼족오광장, 고구려복식관과 사모정, 온달동굴 등 많은 개별 볼거리들이 자리하고 있다.
촬영세트장에서 산 중턱의 온달산성에 이르는 길은 왕복 한 시간 정도의 길로 가벼운 트레킹을 즐기기에 제 격이다.
온달촬영장
거대한 세트장인 온달촬영장은 수, 당 시대의 황궁 및현무문, 낙양성문, 강도의 이궁과 여러 처소 등 귀족들의 저택과
저잣거리를 마치 과거에 와있는 듯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으며 총 55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어 볼거리가 많다. 태왕사신기와
옥중화, 연개소문 등 많은 드라마가 촬영되었고, 현재 방영 중인 <보보경심>과 곧 소개될 <화랑>도 현재 이곳에서 촬영 중이다.
온달동굴
단양을 대표하는 고수동굴이 있지만 많은 관광객들로부터 조금 벗어나고 싶다면 온달관광지에서도 동굴을 만나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약 4억 년 전에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천연 석회암 동굴인 온달동굴은 성산 아래에
있어 일명 성산굴이라고도 하며. 굴의 길이가 760미터에 이르고 온달이 이곳에서 실제 수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온달전시관
고구려 25대 평원왕과 26대 영양왕 때 활약한 온달장군의 충성심과 도전정신을 재조명하고,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 생활상을
테마별로 꾸며 관람객들의 편의를 돕는다. 전장에서 사망한 온달의 관을 군사들이 들려고 하자 움직이지 않았지만 평강공주가
관을 어루만지자 관이 움직였다는 애틋한 전설을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길 위의 길. 이끼터널
길은 지나보면 안다.
뒤에 무엇이 있었고 또 혹시 앞에 내가 기대했던 것이 있는지. 그 기대에 맞는 결과가 아닐지라도 이미 길 위에 서 있었다는 것.
그것으로 길은 그 자체로 감사하다. 이끼터널은 단양시내에서 적성 쪽으로 가는 길에 나타나는 숨은 장소이다. 예전에는
철길이었던 이 길은 철로가 모두 철거되고 난 후 찻길로 바뀌었고 어느 날부터 양 옆에 이끼가 자라기 시작해 어느덧 이끼터널이라
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끼, 그들만의 공간인 이 길을 지나면 곧고 길게 이어지는 철길 굴이 두 개나 이어지고, 사람이 많이 찾지
않는 이 신비감으로 가득한 공간은 단양 또 하나의 비밀로 남는다.
OLDIES BUT GOODIES.
새한서점
낡은 것이 모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잊힌다는 것도 지워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때론 현재보다 더 밝게 또 가끔은 지금
보다 더 침착하게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해주려고 한다. 낡은 것이주는 것은 미처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나친 기억들에 좋은 향수를
뿌린 후 그 시절의 낭만을 환기시켜 가득 찬 내면의 마음을 전하는 것과 같다. 영화 ‘내부자들’을 통해 저 구석 깊은 곳에서 우리에
게 나타난 새한서점. 이곳에서 조승우와 이병헌이 만나 술잔을 기울였던 장면이 기억난다. 새한서점은 적성면 현곡리로 들어와 서
낭당과 정자를 지나 500여 미터의 흙길을 걸으면 나타난다.
이 야트막한 산골짜기에 재활용 건축자재로 지어진 서점은 수만 여권의 도서를 소장하고 있다. 여느 작은 도서관의 도서 보유량이
부럽지않다. 빼곡하게 진열된 책들은 수기로 쓰인 종이로 안내되어 빈티지함과 아날로그를 동시에 꾸미고 있다. 마침 바닥은 흙이라
흙과 오래된 종이와 나무가 합쳐진 냄새가 그지없이 향기롭고 얼기설기 지어진 건물은 인위적인 작업물이 아니라서 오히려 정겹다.
책들 사이로 조용히 걷다 보면 오래전 첫사랑과 나란히 앉아 읽었던 소설책이 구석에서 반짝이며 빛나고 있을지 궁금해지는 곳.
새한서점이 주는 것. 추억과 세월. 그리고 떠나버린, 모든 그런 것들에 대한 환기. 이것으로 이곳의 가치는 고맙고 충분하다.
하늘과의 프로포즈.
페러글라이딩
이것은 단순하게 하늘을 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표현은 뭔가 조금 진부하다. 하늘을 남과 동시에 동쪽의 소백산과 남서쪽의 월악산
사이의 바람을 맞고, 그 속에 안전하게 들어앉은 단양 시내를 바라보며 평소와는 조금 다른 속도를 즐기는 일. 그것이 바로 단양에서
즐기는 패러글라이딩의 정의다. 그리고 때마침 가을이라면 모든 세팅은 완벽하게 준비된 셈. 체험비행 시간이 당일 기상에 따라
유동적일 수밖에 없지만 시속 150킬로미터로 낙하하며, 하늘을 마치 유람하듯 둘러본다는 것은 어쩌면 모든 풍경이 단풍으로 물든
가을 단양에서 가장 먼저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패러글라이딩은 1980년대 프랑스 등산가가 등정 후 신속한 하산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패러슈트 Parchute - 낙하산와 행글라이딩의 합성어로 거의 모든 연령대에서 주어진 교육 내용만 숙지한다면
누구나 비행 체험이 가능하고, 풍부한 비행경력을 갖춘 파일럿이 함께 동반 탑승하기 때문에 안전한 비행을 경험해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연평균 70여일의 활공이 가능하지만 양방산664m에서는 300일에 가까운 날들의 하늘이 열리기 때문에 전국의
패러글라이더들은 유독 단양을 앞서 찾는다. 그래서 요사이 혹자들은 패러글라이딩 체험을 넣어 단양 9경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늘을 날다보면 알까, 혹시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어린 시절과 만나게 될지, 그리고 그때의 시절과
프러포즈를 할지. 일단 하늘에 올라보자.
마을 구경하고 가요. 구경시장
단양을 감싸고 있는 석회암 지대의 토양과 밤낮의 큰 일교차는 마늘 재배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이곳의 마늘은 전국
적으로 최상위 품질에 속할 수밖에 없다. 단양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구경시장을 가는 이유는 바로 단양 마늘을 맛보기 위한 것. 마늘
통닭과 마늘만두, 마늘순댓국 등 마늘로 만들어진 무수한 음식들이 알싸하게 코를 자극해 유독 마늘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구경시장을 두고 지나칠 수 없다. 단단하고 저장성이 강한 단양마늘은 맛이 맑고 깊으며, 청량하게 퍼진 마늘 향은 마치 입안에서 마늘
꽃이 피어나는듯 소담하게 퍼진다. 마늘잔치. 바로 단양에서 꼭 해야 할 일 중에 하나이다.
단양 밤을 잇다. 고수대교 야경
단양의 지형은 남한강이 구불구불 흘러 충주호와 만나러 물길을 나누고, 깊고 깊은 산으로 둘러싸인 까닭에 이웃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이야 단양대교와 상진대교 그리고 북벽교, 영천교 등 많은 다리가 생겨 왕래가 쉬워졌지만 단양시내 바로 앞의
고수대교야말로 오랫동안 단양을 이어온 터줏대감 같은 다리였다. 이 고수대교가 그간의 노고에 보답을 받듯 밤이면 곱게 차려입은
색색의 옷을 입고 밤마실을 나온다. 도담삼봉의 야경이 단양을 대표하지만 조용히 흘러가는 남한강 위 고수대교 야경을 바라보며
밤의 단양을 감상해보는 것 또한 단양에서 지나칠 수 없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