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도의 꽃
인 도 네 시 아
인도양과 남태평양. 그 사이에 떠 있는 섬, 18,108개. 세계에서 가장 섬이 많은 나라 인도네시아는
바다 위에서 그렇게 서로 섬을 품에 안고 섬을 바라보며 섬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적도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인도네시아를 여행하는 것은 그래서 지구에 닿은 가장 뜨거운 태양과 푸른
바다가 만나, 그 둘이 사랑으로 빚어놓은 신의 아이들을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이
적도에 내려앉고 마침 이곳을 지나는 태양의 열기가 섬세한 손길로 그 섬들을 점점의 꽃으로
피워놓으면 이곳은 지구에 남겨진 낙원으로 자라난다. 한국을 떠난 비행기가 몇몇의 섬들을 지나
이곳에 닿을 때, 나는 마치 꽃 속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적도에 핀 꽃 말이다.
바다의 모든 것 라부안 바조
조금 더 들어가 보리라 마음먹었다. 발리라는,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지역에서도 비행기로 두 시간 가까이 동쪽,
아직 많이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인도네시아의 속 깊은 모습을 볼 수 있는 곳. 플로레스 섬의 서쪽 끝에 있는 라부안 바조로
향했다. 이 자그마한 어촌 마을에서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면 섬 주변 곳곳에 국제자연보호기구인 자연보호협회에서
산호초 보호구역으로지정할 만큼 보존이 뛰어난 산호초 군락이 있는 섬들에 닿을 수 있다. 전 세계의 고수 다이버들과 스노클링
마니아들은 이 한적한 라부안 바조를 그들만의 숨겨진 베이스캠프로 삼는다고 한다.
사람들을 실은 배는 바다로 미끄러지듯 라부안 바조를 떠났다.
중요한 것은 적도에 있다는 것이었다. 바다의 신기루처럼 물결마다 적도의 이미지는 일렁이고 있었다. 아득히 먼 것만 같은 그 이름,
적도. 그곳의 바다에는 물과 하늘 단 둘만 남는다. 하지만 그 둘이 펼치는 세계는 지극히 단순하고 때로는 무섭도록 단순하며 또
단순해서 아름답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 그리고 그에 따라 번지는 색깔. 바다로 나간 배는 마침 목선 크루즈였기에 더욱 운치가 있었다.
배가 한 섬을 앞에 두고 잠시 닻을 내렸다. 태양이 넘어가기 전살며시 배에 빛을 드리우면 목선의 겉 표면은 따듯해지고 특유의 나무
질감은 오렌지 빛으로 감싸여졌다. 서서히 태양이 지기 시작했다. 비죽이 솟은 서쪽섬의 산으로 넘어가는 그것은 아마 지구가 처음
생겨난 이후 조금도 다름없이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태양이 지고 난 후, 세상은 적막으로 메워져갔다.파랗던 바다는 검붉은 색으로
또 짙은 검은색으로 빈틈없이 가득 찼다. 그리고 그 시간을 이제는 별들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저마다 편한 자리를 찾고 자세를 잡아
밤하늘의, 아니 밤바다의 별들을 원 없이 보았다. 그것은 감상의 수준이었다. 북반구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적도 부근의 별들의 배치는
조금 낯설어 더 이국적이었다. 그 속에서 별똥별 하나가 지는 모습을 운 좋게 나만 보았다. 1초의 시간이 순간적으로 아득하게 느껴졌다.
마음 속 기도를 드릴까 생각했지만 그것은 차라리 욕심이었다. 이토록 완벽한 시간 앞에서는…
섬에 소복하게 솟은 산으로, 이번에는 아침 태양을 먼저 만나기 위해 올랐다. 아무도 없고 잡풀 이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자그마한 섬, 기리 라와랏 Gili Lawalaut이다. 섬까지 안내하는 작은 보트의 동력 소리만이 새벽 바다 위에서 들을 수 있는 세상의
소리였다. 바닷바람에 실려 어디선가 물 냄새가 났다.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온 태초의 물 냄새였다. 작은 돌들이 듬성듬성
떨어지는 가파른 언덕을 올라산 정상에서 바라본 바다의 정경은 이곳에서만이 가능한 그림이었다. 이른 새벽이라 바람도 잦아든
시간, 그 속에 태양이 어젯밤부터 쉼 없이 달려 다시 이곳으로 나타나주었다. 지친 기색은 없어보였다. 나 역시 그런 태양의 모습에
이곳까지 힘들게 올라온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무수히 많은 선셋을 보았고 유달리 선셋에 집착하는 나였지만 유독 이곳에서만큼은
선라이즈가 더 아름다웠다. 하루 동안 바다 위에서 경험해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이 마무리 되는 순간, 이곳은 적도 극장이다.
쥬라기 파크 코모도 국립공원
언젠가 500곳이 넘는 도시를 여행한 선배는 나에게 이제 단 세 곳만이 남았다고 했다. 그 선배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있던 이스터섬,
갈라파고스 그리고 코모도섬. 코모도라는 그 설렘의 땅은 코모도 도마뱀이라는 무시무시한 포식자들의 이미지와 겹쳐 신비함으로
다가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몸집을 가진 도마뱀이자 공룡과 가장 가까운 유전자를 가진 파충류로 남아있는생물. 인도네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도 유일하게 이 지역 다섯 곳의 섬에만 서식한다는 녀석의 프로필이다. 코모도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다는 코모도의 부속섬,
파달섬으로 향했다. 코모도섬은 도마뱀으로도 유명하지만 북쪽의 플로레스해와 남쪽의 반다해가 만나 열대의 따뜻한 물과 인도양
깊은 곳의 차가운 물을 섞는 까닭에 어느곳보다 해양생물이 풍부한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다. 국립공원이라는 이름은 이 먼 곳의 외딴
섬에게 부여된 자연스러운 결과로 1986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 지역이기도 하다. 작은 보트에 나누어 파달로 들어가는
짧은 여정에는 왠지 스릴과 호기심 그리고 기대감과 약간의 공포감마저 뒤섞였다.
영화로 보았던 쥬라기 공원으로 들어가는 느낌이라고 하면 조금 심할까, 파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는 무조건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야
한다. 흉포하기로 악명 높은 코모도 도마뱀은 녀석들의 상위 개체가 없는 까닭에 점점 더 포악해져 이 고립된 섬에서 무지막지한
포식자로 군림한다고 한다. 대열을 이탈해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한다며, 일 년에 두 명씩 관광객들이 사망한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작년에 한 스위스 여성이 대열에서 이탈해 사라졌는데, 후에 머리카락과
허리벨트만 발견됐다고 한다. 어떤 크기의 먹이든 뼈까지 씹어 먹는 녀석의 식성 때문에 코모도 주민들은 사람이 실종되었을 때,
바다에서 일어난 사고라기보다는 녀석들부터 의심한다
우선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가벼운 트레킹으로 시작한다. 인원에 따라고 한다. 3~4명의 레인저와 함께 구성된 가이드는 앞뒤에서
꾸준히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도마뱀을 보러온 것이지만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곳의 자연은 도마뱀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원시의 길을 걷는 것은 도마뱀을 잠시 잊게 만들 정도로 낯설다. 주위에는 빽빽한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이름 모를 새들은
어디선가에서 낯선 이들의 방문을 울음으로써 주시한다. 숲 속을 지나 그리 길지는 않지만 파달섬의 정상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녀석들의 배설물과 흔적들이 보였지만 아쉽게도 도마뱀을 보지는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아쉬움의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다닐 수도 없는 법, 녀석들이 짝짓기를 위해 숨어버리면 별다른 방법이 없다. 일찌감치 포기를 한 나는 바다를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정상에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멀리 바다가 보인다. 우리가 떠나왔던길, 그 바닷길은 이 숲길과 끝에서 이어진다.
수평선과지평선이 동시에 존재하는 곳, 나는 섬이라는 곳을 그렇게 이해하고 다시 선착장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때였다. 앞에 가던 가이드가 쉿!!이라는 동작으로 전 인원들을 갑자기 주의시킨다. 버려진 건물 앞에 느긋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코모도. 나무 그림자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어두컴컴한 모습의 녀석이 두 마리 있었다. 길이가 족히3미터는 넘어 보이던 녀석.
개만큼 빨리 달리고 엄청난 무게의 꼬리에 맞으면 인간의 다리뼈 정도는 쉽게 부러지며 세균 덩어리의 체액으로 먹잇감을 즉사시킨다
는 그 엄청난 녀석.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고 주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코모도를, 사람들은 발소리를 낮추고 카메라를 꺼내 조용히
담았다. 아마,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조심스럽게 찍어낸 사진이었을 것이다. 코모도는 눈을 껌벅거리며 자신의 휴식시간에 침입한 낯선
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레인저는 끊임없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사람들에게 긴장을 환기시켰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코모도
도마뱀. 한 번 쯤은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대신에, 나는 이상하게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선착장으로 다시 향했다. 코모도도마뱀이 지배하고 있긴 하지만 한적한 섬의 풍경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파달 해변의 모습은
녀석들과 조금 전의 숲 트레킹을 잠시 기억 속으로 묻어둘 정도로 평화로웠다. 현재 섬의 최상위 포식자로 남은 코모도도마뱀이 선택한
곳이어서 그랬을까, 코모도 섬은 어쩌면 녀석들에게도 우리에게도 그런 파라다이스로 남을지 모른다.
나는 어쨌거나 잠시 낙원에 다녀온 것이다.
Under the sea 바다 아래
다음날, 바다가 더욱 잔잔해지며 물빛이 파래지기 시작했다. 다시 기리 라와랏섬으로 향했고 스노클링을 하는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물속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공기를 내뱉고 마시는 스노클과 고글 그리고 오리발. 바다 밑 세상을 구경하기 위한 준비는 끝.
나 역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적당한 온도였다. 적도의 바다에 몸을 담근다는 것은 남태평양과는 또 달리 몹시도 이국적이었다. 파도가
세지 않은 바다에서 보는 산호의 세계는 이제껏 보지 못하던 다른 세상이었다. 비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세상 그리고 현실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세상이 그 아래에 있었다. 처음 보는 주황색, 파란색의 물고기가 보였고 심지어 연두색과 검은색의 친구들도 보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나 은빛의 자태를 드리우며 갈치처럼 유유히 지나가는 녀석도 보였고, 그 색들을 모두 가진 형형색색의
물고기들도 유유히 내 옆을 스쳐갔다. 물이 맑았기에 물고기의 색들은 차라리 빛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반짝거렸다. 가끔 세찬
파도가 치면 주위는 바닥의 모래와 같이 일어 부옇게 변했지만 이내 맑게 돌아왔고 들숨과 날숨이 바뀌는 소리만이 이 극도로
제한되었거나 펼쳐진 공간에서 울렸다. 산호는 바다 속에서 부는 바람에 이끌려 이리저리 하늘거리며 손짓했다. 인도네시아라는
꽃에 내린 후,그 꽃술 속으로 다시 떨어진 것 같았다. 오로지 바다 밑 세상을 탐험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마저 바꾸는 사람을
더러 본 적이 있는데, 얼핏,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만큼 바다 밑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었다.
SPOTS IN 라부안 바조
캘로르섬
돌아오는 길에 들른 켈로르섬. 인도네시아 전역에 산재해 있는 섬들 중 12,000개는 무인도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섬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두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지혜가 부럽다. 역시 다이빙 포인트이기에 아무래도 뭍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쉬운
다이버들은 다시 물속으로 신나게 뛰어들지만, 그저 섬을 산책하고 싶은 사람들 은 모두 하선을 하고 조용히 해변을 걷는다.
길이는 100미터, 폭은 채 20미터도 되지 않는 백사장에 나있는 잡풀과 나무 몇 그루. 바다 위의 산책이 완성된다.
라부안 바조의 시장
모든 장면들이 크게 다르지 않았던 바다를 보고 와서 그랬을까, 요란한 시장과 복잡한 곳의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우리와 다르지 않은
그들의 삶, 그들과 다르지 않은 우리의 삶. 정도의 차이와 그 모습만 다를 뿐, 우는 아이를 달래고 무심하게 코코넛을 가르며 채소를
풍성하게 담아주는모습들. 나는 이들에게도 코모도 녀석과 마찬가지로 왠지 감사하다는말을 전하고 라부안 바조를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