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스민, 정동
덕수궁 대한문 앞에 섰다. 오늘도 수많은 차와 사람으로 북적이는 세종로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곳을 시작으로 근대의 원형을 찾아 걸어보기로 했다. 그곳에서 나는 ‘최초’라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공간들과 격동의 역사를 살아간 인물들을 만났다. 역사는 흘러갔지만 공간은 남아 여전히 그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소월의 시심이 싹튼_배재학당
서울의 심장과도 같은 정동엔 혼란스러웠던 개화기 시절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많다. 정동이란 이름의 시작은 꽤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397년 태조의 둘째 부인인 신덕왕후의 무덤이 이곳에 조성되면서부터 이 일대를 정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정릉동으로 옮겨진 무덤의 자취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여전히 이곳의 이름은 ‘정동’이다.
바로 이곳에 화강석으로 된 배흘림기둥을 받치고 서 있는 배재학당 박물관이 있다. ‘크고자 하거든 남을 섬기라’는 성경의 한 구절이 교훈으로 깊게 새겨져 있는 곳. 그 당시 아직 틀이 잡혀있지 않은 나라였던 이 땅에 아펜젤러라는 27세의 미국 선교사가 그의 아내와 함께 도착한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그는 일본을 거쳐 제물포로, 그리고 서울로 입성했다. 1885년의 일이다. 선교의 목적을 가지고 왔지만 그는 교육에 더 주력하며 집에서 영어 학교를 열어 배재학당의 출발을 알렸다. 시작은 고작 두 명의 학생이었지만 이듬해 고종으로부터 ‘배재학당’이라 새겨진 현판을 하사받는다. 그 시절 온전히 영어로 진행된 수업은 일반적인 과목을 포함해 럭비와 야구, 음악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의 결과는 주시경, 이승만, 나도향, 김소월이라는 역사적 위인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음으로 증명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는 동관에서 이곳을 거쳐 간 이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배재학당 교지에 수록된 시인 김소월의 순수한 감성이 돋보인다. ‘땅 위에 새하얗게 오시는 눈, 기다리는 날에만 오시는 눈, 오늘도 저 안 온 날 오시는 눈...’소월이 바라보던 정동거리에 소복한 눈꽃이 따스하게 쌓이는 듯하다.
서울 주교좌 성당
덕수궁 뒤편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독특하게 접목시킨 건물이 있다. 한국의 전통 건축 기법과 만난 유럽식 설계는 이곳에서 아름다운 건축물로 재탄생했다.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이다. 외형은 십자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다양한 선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1980년 트롤로프와 워너 신부가 한국에 도착하면서 이곳에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건축이 수월했던 것만은 아니다. 1922년 시작된 공사는 4년 만인 1926년에 미완성 상태로 멈춰진 후 70여 년 동안이나 완성되지 못했다.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996년에 들어서야 가능했다고 하니 너무나 오랜 기다림 속에 탄생한 성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미완성 상태로 사용하는 동안 오히려 이 성당의 설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에 처마장식, 기와지붕과 같은 한국의 건축 양식이 더해졌고 작년 여름, 성당 앞을 병풍처럼 막고 있던 세무서 빌딩이 철거되면서 성당은 더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 담길 수 있게 됐다. 지금 이곳 지하 성당에 잠들어 있는 트롤로프 주교는 한 사람의 열정이 그토록 척박한 땅에서 어떤 열매를 맺어 왔는지 가늠이나 할 수 있었을까. 오늘도 덕수궁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성당의 붉은 벽돌은 겨울 햇살아래 여전히 선명하기만 하다. 마치 오래전 떨리는 마음으로 성당의 주춧돌을 놓던 그날처럼 말이다.
대한제국의 운명이 엇갈린_중명전
정동극장 옆, 무심코 지나가기 쉬운 작은 골목길이 있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이 좁은 길 끝에서 최초의 서양식 도서관인 중명전을 만날 수 있다. 1897년 러시아 건축가가 설계한 이 건물은 본래 덕수궁 내에 있었지만 도로가 생기면서 궁궐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도서관 건물로 지어졌지만 중명전의 운명은 접견실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인 배정자의 자택으로,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교장에서 주한 외교관 관저로 그 기능을 계속해서 바꿀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일제의 압박으로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한 장소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중명전을 침범해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한 일본은 이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완벽하게 박탈해갔다.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황실 도서관으로 근대 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가 담겨있던 중명전. 바깥바람이 매서운 겨울날이지만 중명전의 창문을 통해 내려앉은 햇살은 꽤나 따스했다. 다시 골목 끝에 중명전을 두고 돌아서는 길, 조용하고 쓸쓸한 길 위에 홀로 서 있는 모습이 아련하기만 하다.
'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하였지만 덕수궁 돌담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아관파천 그리고_구 러시아 공사관
정동은 기독교와 근대식 학교 뿐 아니라 각국의 공사관과 대사관들이 밀집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후기부터 이곳은 서양의 문화를 상징하던 거리로 불렸다. 미국을 시작으로 프랑스, 영국, 독일, 러시아 등의 공관들이 정동에 차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었기에 정동은 서울 속 서양인 거리로 불렸다.
당시 공사관 중에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곳은 역시 러시아 공사관이었다. 그 시절 러시아의 막강한 권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높은 언덕에 자리한 러시아 공사관은 정동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현재 전체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3층 규모의 탑만이 남아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은 불안감에 더 이상 경복궁에 머물 수 없었다. 다음 해 세자와 함께 궁을 떠나 머물기 시작한 곳이 바로 러시아 공사관이다. 고종은 세자와 이곳에 일년 간 머물렀다. ‘넓은 만찬실은 고종의 거실로 사용했고, 거실 서쪽 벽에는 왕의 침대, 남쪽 벽에는 소파 세트가 있었다. 작은 측실에는 왕의 시중을 드는 상궁들이 거처했고, 나머지 궁녀들은 거처할 방이 없어 공사관 복도에 칸을 막아 지냈다.’ 당시 제중원 원장이었던 올리버 에비슨 박사의 눈에 담긴 러시아 공사관 풍경이다. 힘없는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조선은 일제의 압박에서 다시 러시아의 간섭으로 쉼 없이 휘둘려야 했다. 만약이라는 가능성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던 고종의 깊은 한숨이 서려있는 곳이다.
어둠에서 빛으로_이화학당
근대화로 접어드는 시기, 여성들은 말 그대로 암흑 속에서 인권을 잃은 채 살아가야 했다. 그 때문인지 이화학당의 설립자인 스크랜턴의 교육관도 어찌 보면 너무나 소박했다. 생활과 환경에 맞추어 발전해가는 한국의 소녀상을 꿈꾸기 이전에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이 되게 하는 것’에 교육 목적을 두었다.
그러나 여성이 교육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사회 풍토 때문에 배재학당과는 달리 학생이 모이지 않았다. 개교한 뒤 반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서야 첫 학생을 맞이할 수 있었다. 콜레라에 걸려 사망한 어미 곁에 있던 네 살배기 아이와 가난 때문에 가족과 함께 살 수 없었던 소녀 등, 처음에 이화학당의 문을 두드렸던 소녀들의 상황은 비참했다. 그러나 남편과 사별한 후 의사인 외아들과 함께 한국에 온 스크랜턴의 굳은 의지는 척박한 땅에서 빛을 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홍색의 저고리와 치마를 교복으로 입은 소녀들이 하나 둘씩 늘어갔다. 그 후 이화학당은 유관순 열사와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 최초의 박사학위 취득자인 이화여대 총장 김활란 등을 길러냈다. 이화여고 앞에 있는 붉은 벽돌의 심슨기념관에서 이화학당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다. 졸업생인 유관순 열사가 공부했던 교실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어 당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20세기를 이끈 여성 중 대부분이 이곳 출신이다. 정동의 중심에서 꿈을 꾸며 자라났던 그녀들이 바로 대한민국 신여성의 1세대이다.
정동제일교회
명동성당의 거대한 위용과 견주면 낮고 넓게 퍼진 형태의 정동제일교회. 오후나절 한가로운 정동거리의 운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한국전쟁과 화재를 겪으며 파손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잘 복원되어져 지금의 정동을 지켜내고 있다.
앞서 방문했던 배재학당을
설립한 아펜젤러가 한옥 한 채를 구입해 예배당으로 사용했던 것이 정동제일교회의 출발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500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서양식 건축물이 들어섰으니
당시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며 교회는 종교적 역할 이상의 기능을
담당했다. 예배당 안 파이프오르간 아래, 비밀스러운 밀실이
숨겨져 있다. 1800년대 후반, 항일 운동의 거점으로 사용된
이 밀실에서 3·1운동에 사용되었던 각종 유인물과 독립선언문이
제작되었다. 하얀색 아치형 창틀 너머 은은하게 퍼지던 오르간 연주가 감춰야 했던 비밀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담임목사와 전도사가 감옥에 갇히는 등의 호된 책임을 물어야했다.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잊은 듯 담담히 노래한다.
그저 언덕 밑 정동 길에 아직 남아 있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