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그라츠] 파스텔톤 로망


 



G R A Z

그 라 츠

슬라브어로 ‘작은 요새’라는 뜻의 그라츠. 요새 정상의 성벽에 서자 누군가 읊조리던 이 도시에 대한 수식어들이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문화, 예술, 미식, 향락, 그리고 로망스. 사뿐히 성벽을 넘어 주홍 지붕들 사이사이를 유유히 날아다니고픈 그라츠에서의 로망.



오스트리아 남부 슈타이어마르크Steiermark주의 주도이자 알프스가 끝나고 평야가 나타나는 지역에 위치한 그라츠Wien에 이어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빈에서 약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부 유럽에서 가장 보존이 잘 되어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시가지는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는 유네스코 디자인 도시로 등재되어 문화와 예술의 향취가 넘쳐나고 2003년 ‘유럽 문화의 도시European Capital of Culture, 2008년 ‘오스트리아 미식의 수도’로 선정되었으며 문화애호가와 미식가들이 끊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또한 무수히 많은 바와 카페, 선술집 등이 있어 ‘향락의 도시’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이른 새벽을 닮은 그라츠의 밤풍경

하늘이 거뭇하게 물들어가는 시간에 도착한 그라츠는 말없는 미소년 같았다. 옅은 조명들이 거리를 비추는 것 외에는 미세한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아 오스트리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상점 밖으로 테이블이 빼곡하게 늘어서 저녁을 먹으며 맥주잔을 부딪치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 같은 거리에는 질서정연하게 주차된 자동차들과 홀연히 지나가는 자전거 그리고 느릿한 걸음의 행인 한 명이 전부. 숙소에 올라와 창문을 열자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와 차가워진 밤공기가 얼굴에 와 닿았다. 하늘을 향해 뾰족이 솟아오른 몇몇 첨탑과 건물의 주홍 지붕들 위로 어둠이 점점 짙어지며 도시의 밤풍경은 더욱 차분하게 바뀌어가고 있었다. 아직 낯설고 어색한 탓일까. 아침을 기다리는 마음이 더욱 바빠지고 있었다.




미식 수도의 비밀, 파머스 마켓

  맑게 갠 하늘은 그라츠의 작은 거리를 산뜻하게 바꾸어 놓았고, 작은 상점과 카페 앞은 화사한 꽃들이 싱그러운 그라츠의 아침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라츠 사람들이 살고 있는 작은 골목들을 지나 가벼운 발걸음이 멈춰선 곳은 간판도 지붕도 없는 거리의 시장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이 시장의 이름은 렌드플 라츠 마켓Lendplatz Market. 인근 지역의 농부들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키우고 재배한 유기농 제품들을 판매하는 농산물 직판장이다. 중간 상인 없이 생산자가 판매하기 때문에 가격도 저렴하지만, 이곳에서 판매되는 농산물들은 무엇보다 좋은 품질로 소문이 자자하다.



    시장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분위기에 발걸음도 조심스러워지지만 끊임없이 궁금한 것들이 생겨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생전 처음 보는 농산물들, 놀라울 정도로 커다란 크기, 바로 음식을 할 수 있거나 먹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식재료들. 잔뜩 장을 봐서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드디어 이 시장을 방문한 이유를 만났다. ‘검 은 금’이라고 알려진 슈타이어마르크산 호박씨 오일. 호박씨 오일 대회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이 천연의 암녹색 오일을 먼저 맛볼 수는 없지만 일단 한 병 사서 가방에 넣었다. 조심조심 한국까지 가져온 호박씨 오일은 지금도 끊임없이 식탁 위에 새로운 음식들을 올려놓고 있다.




그라츠를 맛보다, 레스토랑 가스토프 스타인체르바우어

  시장을 둘러보다 이곳 음식에 대한 궁금증을 못 참고 그라츠의 맛을 찾아갔다. 그라츠의 지인이 추천해준 곳은 레스토랑 가스토프 스타인체르바우어. 지역에서 생산하는 농산물로 만든 오스트리아 전통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면서 2015년 호박씨 오일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오일을 맛볼 수 있어 더욱 구미가 당겼다. 고풍스러운 건물 사이에 난 돌바닥 길을 따라 가니 옛 성문을 연상하게 하는 커다란 철문의 레스토랑이 나타났고, 내부로 들어가자 건물 속 아기자기한 휴게실 같은 공간에 이미 많은 이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리를 잡고 앉자 메뉴판을 들고 온 중년 신사가 요일마다 바뀌는 오늘의 메인 요리와 이 집만의 특별식인 ‘Classic’ 메뉴에 대해 소개를 해주었다. 그저 메뉴에 대한 설명을 했을 뿐인데 그의 정중한 목소리엔 음식에 대한 남다른 자부심이 가득히 담겨있었다.



  전통 방식의 연어요리, 닭요리를 시키며 특별히 부탁한 것은 바로 이 집의 호박씨 오일. 아침부터 궁금하던 호박씨 오일, 그것의 챔피언이 만든 ‘검은 금’은 과연 어떤 맛일까? 그라츠 사람들은 보통 바닐라 아이스크림이나 스크램블 에그 위에 뿌려서 먹는다고 하지만, 그 맛은 연어요리에도 닭요리에도, 그저 스푼으로 조금 떠먹어도 묘한 떨림을 주는 중독성이 강한 맛이었다. 그 맛에 대한 강한 환호와 찬사 때문이었는지 중년의 신사는 지하의 보물창고로 안내했다. 그들의 선조들이 만들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오래된 와인부터 곳곳에서 수집한 와인들을 보관하고 있는 와인 창고는 그라츠와 이 레스토랑이 음식으로 사랑받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숨겨진 증거였다.





빛바랜 주홍의 물결, 구시가지

산책하듯 길을 걷다가 절벽에 지그재그로 놓인 계단을 만났다. 그 계단은 475m 높이까지 이어져 슐로스베르크 언덕의 정상으로 나를 안내했다.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계단을 오르는 법과 리프트를 타고 편안하게 올라가는 방법 두 가지. 일행과의 가위바위보 게임에서 이겨 편안하게 리프트를 타고 ‘작은 요새’라는 의미를 지닌 그라츠의 정상에 올랐다. 10세기부터 슬라브인들은 그라츠를 지키기 위한 성곽을 이곳에 건설했다. 오스트리아에서 곡물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창지대이면서 헝가리, 슬로베니아 등과 국경을 접하고 있어 유난히 전쟁이 많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은 그라츠의 요새를 대부분 파괴시켰지만 3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온 나폴레옹은 900명의 군사로 맞선 그라츠 군대에 결국 패배하고 돌아가야 했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지만 이곳은 그라츠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로, 또 그라츠의 옛 시가지 풍경을 느낄 수 있는 여행지로 오늘날 뜨겁게 사랑받고 있다. 그 이유는 그라츠의 명물 시계탑 앞에 서서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또렷이 확인할 수 있다. ‘대체 몇 개나 될까’ 궁금해지는 낡은 주홍색 지붕들과 군데군데 뒤섞인 현대식 건물들이 그라츠에 남겨진, 그리고 지금도 말없이 이어가고 있는 긴 세월을 얘기하고 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구시가지의 풍경은 연인들에게는 사랑의 약속이기도 하다. 시계탑 앞에서 키스를 하면 사랑 이 영원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서일까. 행복한 미소를 가득 머금은 다정한 연인들의 모습이 더욱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