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에 앞서 일본 지도를 펼쳐들었다.
우리나라의 ‘도’와 같은 개념인 ‘현’으로 나뉘어 있는 수많은 지명들 가운데 구마모토현과 나가사키현을 찾았다. 구마모토현의 아마쿠사와 나가사키현의 미나미시마바라는 서로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다. 음식과 문화를 공유할 수밖에 없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오늘날 신화처럼 여겨지는 이 지역의 아픈 역사까지 닮은꼴이다. 일본에서 가장 먼저, 가장 넓게 기독교가 퍼져나간 이곳은 최근에도 순교자의 유골이 발견될 만큼 혹독한 박해를 받아낸 현장이었다. 아마쿠사를 여행하는 동안 ‘순례’라는 단어는 그저 역사적인 현장의 주인공들에게만 허락되는 특별한 단어가 아니었다. 역사를 안다는 것, 그 자체가 미래의 지침을 찾아내는 첫 걸음이라고 믿는 수많은 이들이 이미 이곳을 다녀갔다. 아마쿠사와 시마바라에 머무는 동안 일본 역사에서 기독교와 정부가 맞선 유일한 민란을 이끌었던 ‘아마쿠사 시로’를 만날 수 있었다. 거대한 동상부터 박물관, 하다못해 과자봉지에도 시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아마쿠사가 간직한 이야기들 위에 아직 떠나지 못한 꽃향기를 따라 걸었던 날들의 기록.
못다한 이야기
사키츠교회 & 역사관
바다로 둘러싸인 아마쿠사와 시마바라는 위치상 서양문화의 영향을 일찍부터 받아왔다. 1613년에 발령된 금교령과 대흉작이 겹쳐 이 지역의 사람들은 극심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영주들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무거운 연공으로 민중들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결국 연공을 내지 못한 한 임산부가 한겨울 강가에서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사건을 계기로 농민들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당시 만 16세였던 아마쿠사 시로는 어린나이임에도 총대장으로 활약하며 정부에 맞서 필사적인 전투를 펼쳤지만 3만 7천명의 농민들은 결국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봉기군 속에는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잔혹한 역사의 흔적은 여전히 짙게 남아있는 게 사실이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사키츠 교회. 잔잔한 요카쿠 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촌의 작은 교회로 1934년 프랑스에서 건너온 하르프 신부가 재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이하게도 교회 건물의 반은 목조이고 나머지 반은 콘크리트로 되어있는 이 교회는 숨어 지내야만 했던 신자들에게 성지와 다름없었던 곳이다. 교회 자체는 아담하지만 이곳에서 자신의 신앙을 목숨과 바꿔야 했던 이들이 있었기에 그 의미는 교회의 규모에 비교해 가늠하기 어렵다.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켜냈던 이들의 성지였던 사키츠 교회 앞 역사관에서 그들의 못다 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아마쿠사
돈부리 페어
조수의 흐름이 완만한 아마쿠사 주변의 바다는 싱싱하고 질 좋은 해산물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일본 해산물의 자랑거리인 보리새우와 기름기 가득한 탄력 있는 살로 유명한 도미, 담백한 맛이 일품인 황금 갯장어까지 아마쿠사의 온화한 바다가 낳은 해산물들을 맛보는 것도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사계절 내내 바다에서 건져 올린 해산물을 활용한 요리들이 발달한 편이라 이와 관련한 축제들도 열린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축제로 손꼽히는 아마쿠사 돈부리 페어는 꼭 체험해보는 것을 추천한다. 고슬고슬하게 지은 밥 위에 다양한 재료를 토핑으로 얹어 내는 일본의 덮밥 요리인 돈부리는 싱싱한 해산물을 든든한 한 끼로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 돈부리는 비벼먹는 한국의 덮밥과는 달리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며 먹을 수 있어 감칠맛을 더한다. 아마쿠사에서 열리는 돈부리 페어는 대게 11월 초순에서 3월 하순까지 진행되며 지역의 30개 정도의 식당들이 참여해 다양한 메뉴의 덮밥들을 선보인다.
국립공원을 품은 올레
제주올레의 뜨거운 호응이 그대로 옮겨간 곳, 단연 규슈올레다. 제주 올레의 자매 버전으로 탄생한 이 길은 규슈의 아름다운 풍경을 오감으로 느끼며 새로운 일본의 매력을 발견하는 길이다. 시로의 고향으로 알려진 아마쿠사는 한가롭고 고즈넉한 멋이 있는 마을이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중 도착한 첫날, 야속하게도 아마쿠사 전역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버스 주차장에 내려 잠시 교회를 향해 걸었을 뿐인데 이내 겉옷은 눅눅히 젖어버렸다. 13곳에 달하는 교회와 성지들이 곳곳에 있어 그리스도교 관련 유산으로 세계문화유산등록까지 추진 중인 지역이기에 어찌 보면 낮게 내려앉은 흐린 하늘이 그 아픈 역사와 잘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이튿날 올레길의 출발점에 놓인 ‘간세 파란색, 다홍색의 리본이나 나무 화살표 ’ 앞에 섰을 때, 하늘은 잔잔한 내해와 이 땅의 비옥한 대지를 눈부시게 비춰내고 있었다. 그제야 아마쿠사 제도는 놀라움과 기쁨이 넘치는 파라다이스의 면모를 수줍게 드러냈다. 장대한 역사와 푸른 해안, 화창한 경치를 따라 걷는 아마쿠사 올레길에는 귤과 꽃향기가 가득했다. 따스한 햇살 아래 너무나도 평화로운 길을 걸으며 이 길이 아픈 역사가 담긴 순례의 현장이었다는 사실을 나는, 자주 잊었다.
올레길가이드
코스 내의 중요한 장소에는 항상 ‘간세’라 불리는 말 모양의 오브제가 있다. 이러한 간세가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길목에서 중요한 열쇠가 되니 보는 법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간세의 머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걸어야하며 현재의 코스와 위치, 남은 거리까지 표시되어 있으니 올레길에서는 가장 확실한 이정표이다. 또한 목재로 만들어진 화살표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서 방향을 나타내는데 파란색은 정방향, 빨간색은 역방향을 나타낸다.
아마쿠사·레이호쿠 올레 코스
규슈올레 15번째 코스인 아마쿠사-레이호쿠 코스. 총거리는 11킬로미터로, 대규모 봉기의 주요 격전지였던 토미오카성과 기암절벽이 늘어선 토미오카해안, 소소한 마을 골목들과 더불어 오랜전통을 자랑하는 화과자 가게 등이 어우러져 즐거움을 더한다. 걷기 여행과 더불어 온천욕과 싱싱한 해산물 요리를 즐길 수 있어 후반에 이름을 올린 코스임에도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있다.
올레길 위의 이색 바위
해수의 영향으로 형성되었다고 추측되는 유방바위. 지름 약 1.5미터의 변형 바위로 여성의 유방과 비슷한 형태로 썰물일 때만 볼 수 있는 이색 볼거리이다.
아마쿠사 여행을 더욱 즐겁게!
야생의 생명력
이루카 워칭
이루카 워칭이라 불리는 돌고래 관찰 투어는 야생의 생명력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다. 투어라고 해도 오랜 기다림 끝에 등장하는 두어 마리의 돌고래를 상상했다면 뜻밖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아마쿠사 해변에 속하는 오니이케항에서 배를 타고 바다로 10분만 나서면 야생 돌고래들의 세상이 펼쳐진다. 배가 다가가도 멀어지거나 숨지 않고 오히려 곁에서 장난치듯 힘차게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수십 마리의 돌고래 떼가 수시로 등장한다. 먹이가 풍부한 츠지시마 섬 인근에는 무려 300여 마리의 돌고래가 서식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어 사계절 돌고래를 만날 수 있다.
아이노아마쿠사무라 물산관
거대한 아마쿠사 시로상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지역의 신선한 여러 농수산물이 모여드는 대형 매장이다. 신선한 식재료부터 농부의 이름이 적혀있는 안심 먹거리와 싱싱한 생선을 기본으로 만든 다양한 종류의 어묵도 판매한다. 또한 시로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프리미엄 소주 ‘아마쿠사’도 구입할 수 있다. 쇼핑 후 15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시로상과 기념사진을 찍는 것으로 아마쿠사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