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윈 설움에 잠겨있던 날들이었다.
모란이 피기까지 기다릴 수 없어 찬란한 봄을 마중 나갔다. 또 한 해가 다 가고 말았다는 서운함에 가슴은 자꾸만 남쪽으로 가자며 나를 보챘다.
지고 말면 그뿐이라 했지만 그토록 무심한 아름다움에 마음은 또다시 봄을 향해 서성이는 겨울, 강진에서의 하룻길.
남도의 봄은 역시 빨랐다. 강진만이 내륙 깊이 스민 이 땅엔 가우도를 중심으로 이미 겨울을 걷어낸 표정이었다. 시인 김영랑이 평생 순수시를 쓸 수 있었던 모든 이유가 바로 강진에 있었다. 지난 두어 달 동안 몸의 일부처럼 두르고 다니던 두터운 코트까지 벗어두고 강진 구석구석을 걸었다. 때로는 계절을 잊은 채 철없이 피어난 꽃망울 앞에 멈춰 섰고, 얼음을 녹이고 맑게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가만히 귀기울이기도 했다. 햇살이 내려앉은 나무 의자에 앉아 새들의 지저귐에 눈과 귀를 모두 내어주던 오후. 이 땅이 모두 조금씩 봄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루 머무는 것으로 강진에 깃든 완연한 꽃내음을 적어 내려간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하지만 그렇기에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으로 남았다.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던 시인 김영랑의 마음이 내게도 전해지는 날이면 주저 없이 떠날 곳이 생겼다. 삼백 예순 날을 하루같이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강진이다.
시문학파
기념관
힘겨운 시대를 견뎌내야 했던 1930년대. 강진에서 태어난 시인 김영랑은 문자 그대로 순수시를 대중에게 선보이며 민족과 시에 대한 희망의 불꽃을 피워냈다. 누가 시는 아름답지만 쓸모없다고 했을까. 고통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내 속에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그 시절의 많은 이들은 김영랑의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절절히 공감했다.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시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영랑이 강진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시인 자신에게도 행운이었다. 그 어느 곳에서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가우도를 바라보며 자라난 소년은 평생 강진만의 아름다움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차분히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한 서정을 노래하던 시인의 심성은 그의 고즈넉한 고향 풍경과 맞닿아있다. 표면적으로는 기다림, 상실, 소멸에 대해 이야기 했지만 그가 진정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기다림과 기대이다. 해마다 피어나고 또 지는 모란이 그에게 어찌 이토록 찬란한 슬픔을 전해주었는지. 그의 문학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문학파 기념관에서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고바우공원
나무를 하거나 장을 보러 다니던 사람들이 쉬어가던 곳. 저두리와 사당리의 경계 해안가에는 전망 좋은 고바우 공원이 있다. 고바우 전망대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우리가 흔히 보아왔던 타워의 형상은 아니다.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강진만의 품에 안긴 듯 야트막하게 지면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도로에서는 잘 보이진 않지만 자연과의 조화가 돋보이는 착한 전망대인 셈이다. 아무리 무거운 짐을 지고 왔던 이라 하더라도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쉬어가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 제집을 떠나 강진을 여행하는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 같아서 먹먹한 마음에 오래 머물다가 남도의 노을까지 만날 수 있었다. ‘무거운 짐과 먼 길에 지친 사람은 이곳에서 쉬라.’ 공원 이정표에 적혀있는 글귀는 강진만의 풍경과 함께 위로를 건넸다. 이제 강진에 도착했을 뿐인데, 너무나 많은 것을 받은 느낌. 어느 새 붉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 저 멀리 가우도가 너울졌다.
초당림
맑은 공기를 내뿜는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초당림으로 향했다. 나무 데크를 따라 산책로를 걷다보면 자연의 작은 요소요소들이 건네는 언어에 민감해지게 된다. 치유의 숲이라 불리는 초당림은 피톤치드가 충만한 국내 최대의 인공 숲. 편백나무와 삼엽송, 삼나무와 백합 등 400만 그루가 함께 호흡하고 있는 곳이다. 아무것도 없던 민둥산을 숲으로 만들기까지의 정성이 느껴진다. 산책로를 따라 흐르는 물은 운치를 더하고 사계절 다른 자연의 매력을 뽐내기에 완벽한 조화를 이룬 풍경. 베푸는 것에 익숙한 자연에 새삼스러운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초당림이다. 숲을 조성하고 나무를 심은 것은 사람이지만 하늘을 향해 오랜 세월 제 키를 높여온 나무들의 성장은 온전한 자연의 몫이 아닐까. 아침 일찍 찾은 초당림은 맑은 숨을 내쉬고 있는 커다란 생명체 그 자체였다. 이른 아침 찾아온 초당림에서 치유라는 이름의 산책을 했다. 초당림 숲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개방하는 것은 아니므로 초당림에 가기 전에 문의하는 것이 좋다. 여름철에는 피서객들을 위한 물놀이장도 개방하고 있다.
고려청자 박물관
고려시대 강진의 대구면은 청자 제작의 중심지였다. 은은하게 푸른빛이 도는 청자는 고려시대를 넘어 세계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런 청자를 제작하던 가마터가 전국에 400여 기인데, 그 중 절반이 바로 강진에서 발견되었다. 청자를 직접 만들었던 실제 가마가 그대로 보호되어 있으며 제작현장도 둘러볼 수 있어 그 의미가 크다. 박물관 관람 후 도예교실에서 청자 빚기 체험도 가능하다. 물레 성형에서부터 나만의 무늬를 넣은 작품을 만들면 유약을 발라 구운 후 택배로 보내준다.
서문공원
공원이라는 말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섰다가 주차장에서부터 시야를 꽉 채우는 압도적인 풍광에 놀라게 되는 곳. 웅장하고 신비한 모양의 기암괴석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공원이다. 석문산과 만덕산, 이 두 개의 산들을 구름다리로 연결해 놓았다. 단절되어 있던 등산로가 다리로 연결되어 등산객들에게도 관광객들에게도 훌륭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사랑을 테마로 놓인 이곳에는 역시나 연인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따스했던 강진의 바람도 산 중턱의 전망대에 오르자 맹렬한 바람소리를 내며 거칠게 불어왔다.하지만 구름다리 위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담으려는 연인들에게는 매서운 바람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다. 사랑스런 표정으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던 연인들에게 오늘, 이 구름다리 위에서의 시간은 완벽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무위사
고려시대의 이야기다. 이곳에 법당이 완성된 뒤 이 절을 찾아온 한 노인 거사가 이곳에 벽화를 그리겠다고 했다. 거사가 원한 것은 단 한 가지, 49일 동안 법당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는 당부였다. 하지만 49일째 되던 바로 그날, 무위사 주지는 문에 구멍을 뚫고 그만 안을 훔쳐보고 말았다. 입에 붓을 물고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던 파랑새는 인기척을 느끼고 날아가 버렸고 지금도 후불벽화의 관음보살상에는 눈동자가 없다. 그저 신화처럼 먼 옛날이야기 같지만 목조로 지어진 무위사의 극락보전 앞에 서면 그 이야기가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든다. 소박한 모습이지만 신비하고 단아한 극락보전. 그 건물 자체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을 만큼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무위사를 감싸고 있는 바위가 많은 월출산도 사찰의 일부처럼 법당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월출산 산자락에 맑은 목탁소리가 스미는 오후. 49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는 영겁의 세월을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괜찮을 듯싶은 극락보전의 단정한 풍경 앞에서 한국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백운동
별서정원
월출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안개가 되어 구름으로 떠올랐다. 백운동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별서 정원. 다산 정약용 선생이 이곳을 다녀간 뒤 아름다운 경치를 잊을 수 없어 제자 초의에게 <백운동도>를 그리도록 했다.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세연정과 함께 호남의 3대 정원으로 꼽히는 이곳은 조선 중기 선비들의 은거문화를 알 수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별서정원으로 조성된 조선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시대부터 이곳에 백운암이 존재했었다고 하니 자연이 만든 이 비밀스런 공간은 예나 지금이나 수려한 자태였음에 틀림없다. 유배생활 중이었지만 별서정원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다산 선생에게 있어 몸과 마음이 모두 쉬어가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이미 흘러내린 물과 같은 처지였지만 다시 구름이 되어 떠오를 날을 꿈꾸었을 그에게 백운동 별서정원에서의 시간은 각별했던 것 같다. 강진에서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강진의 자연과 사람들은 그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해풍을 맞고 자란 강진의 깊은 찻잎에서, 그의 신념을 믿고 따라준 제자들의 눈동자 속에서, 봄이면 또다시 피고 지는 봄꽃에게서 그는 희망을 읽었다. 무거운 짐과 먼 길을 돌아왔던 고단함을 강진에 내려두자 비로소 그에게 새로운 힘이 생겼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또한 처음으로 이곳을 찾은 한 이방인에게도 강진은 따스한 위로와 힘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