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걷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강릉 해안누리길

걷지 않으면 담을 수 없는 풍경
해안누리길 38코스, 강릉 아들바위 가는 길

차를 타고 스쳐가는 순간에 우리는 수많은 풍경들을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문진에서부터 사근진해변까지 이어지는 해안길은 그래서 조금 힘들게 걸어도 좋은 길이다. 해안가에 숨겨진 해변과 마을, 그 곳의 풍경을 더욱 풍성하게 해준 자연의 선물들이 끊임없이 눈앞에 찾아든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를 잇고 있는 길 53개를 해안누리길이라고 한다. 해양수산부와 한국해양재단이 선정한 전국의 걷기 좋은 이 길들은 그 속에 천혜의 비경과 함께 흥미로운 이야기와 역사를 담고 있다. 해안누리길 38코스인 강릉 아들바위 가는 길은 강릉바위길 12구간 및 해파랑길과 그 코스를 함께 하며, 강릉의 과거와 현대의 모습을 묵묵히 보여준다. 아름다운 해변 위에 뿌려진 자연이 만들어낸 기묘한 풍경들, 어시장에서 숨 쉬고 있는 이곳 사람들의 살아가는 풍경, 이미 휴가를 떠나온 사람들의 여유가 마냥 부러워지는 해변과 송림까지, 16km의 길 안에 남겨 놓은 발자국만큼이나 소소한 것들의 풍요로움이 가슴속에 진하게 남는 길이다.

향호해변
주문진해변

철책과 초소, 그것들을 바라보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른 여름이지만 겨울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만 같은 차가움이 철조망 뒤 바다 위로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북한괴뢰군이 바다 위로 떠올라 철조망을 향해 달려올 것 같은 불길한 상상은 주문진해변에 이르러 말끔히 날아갔다. 알록달록 벤치에 쓰인 '추억과 낭만이 있는 곳'이라는 문구, 어딘지 우스꽝스러운 빨강 입술의 조형물이 바닷가의 온도를 따뜻하게 데워놓고 있었다.

아들바위 공원

해안누리길 38코스의 이름이기도 한 아들바위에 이르자 바다는 과거로 돌아갔다. '아이를 갖기 못하던 노부부가 점쟁이의 말대로 바다에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다 아이를 안고 그대로 굳어버린 바위에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올렸더니 100일 뒤 아이를 갖게 됐다'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은 전설이 바위의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모습으로 인해 왠지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주변 바다에 제멋대로 자리를 잡은 이름 없는 바위들은 뜻밖에도 공룡이나 깊은 산 속에 숨겨진 자연동굴 속 신비한 세상이 생각날 만큼 원시적인 모습들. 어느 전설 속 주인공이 먼 산에서 수만 년 된 동굴을 가져다가 바다 위에 옮겨놓은 건 아닐까.

주문진 수산시장

동해안 최고의 수산시장으로 꼽히는 주문진 수산시장이 가까워지면서 생선가게와 횟집, 길에서 말리고 있는 건어물, 젓갈가게 등이 하나둘 모습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입구를 지키고 있는 주문진 수산시장으로 접어들자 왁자지껄한 상인들의 말소리와 함께 그동안 곁을 지켜주던 바다 풍경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발걸음이 바빠지는 건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기 때문. 해안길을 누리는 방법 중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니, 잠시 가야할 길은 잊고 시장 속으로 스며들어 가 마음껏 음식을 탐해도 좋은 시간이다.

영진해변

다시 접어든 바닷가. 어느새 강릉 시내 전경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색이 다른 등대 몇몇과 등대들을 받치고 있는 방파제들이 파란 하늘 아래 단조롭던 바다를 조금 더 풍요롭게 바꿔놓았고, 누군가 수고스럽게 이곳까지 가져다놓은 낡은 소파에는 한 나이 많은 노파가 앉아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여러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있는 것 같은 그 뒷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말없이 셔터를 한 번 눌렀다. 바로 옆 해변에는 한때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던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가 있다. 그곳에서 인증샷을 남기는 이들이 줄을 서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같은 등대라도 걸을 때마다 그 모습은 계속해서 바뀌고, 같은 바다에서도 우리의 관심은 서로 다르다.

영진교

바다 위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 붉은색으로 칠해진 인도는 군데군데 하얀 얼룩으로 진하게 물들어있다. 그 자리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어김없이 키 큰 가로등이 멀뚱히 서 있고, 가로등의 머리 부분에 갈매기 몇 마리가 줄지어 앉아있다. 갈매기들이 떨어뜨리는 배변을 맞을지도 모르는 혹시 모를 불의의 사고를 피하기 위해 얼른 다리를 통과하려 했지만 다리 너머에 펼쳐진 뜻밖의 풍경 앞에서 그대로 멈춰서고 말았다. 갈매기 떼가 연출 중인 TV에서도 보지 못했던 낯선 장관. 다시 생각해보니 TV에 나올 만큼 어마어마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그토록 감사한 순간을 맞이했다.

연곡해변

해변 앞을 둘러싸고 있는 울창한 송림이 반가워 쉬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아직 더위는 무르익지 않았지만 이미 송림 사이에 차려진 캠핑장에는 휴가를 떠나온 사람들이 아늑하게 자리를 잡았다. 설사 캠핑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곳에서는 하룻밤 묵어가고 싶어지는 키 크고 품 넓은 그늘의 포근함이 갈 길 바쁜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럼에도 훌훌 털고 일어나 길을 다시 걸을 수 있는 건, 숲길이 전해주는 푹신함 때문. 그럼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어, 다음 여름휴가를 기약하게 되는 곳임에 틀림없다.

사근진해변

연곡해변의 숲을 빠져나와 다시 약 7km의 해안길. 하얀 백사장과 파란 바다와 푸른하늘이 끝없이 이어지다가 커피 한 잔이 어느 곳보다 더욱 여유롭게 느껴지는 사천진해변을 지난다. 경포도립공원에 접어들면 다시 숲을 만나고 그렇게 어느새 강릉 아들바위 가는 길의 종착지 사근진해변이다. 뒤돌아보면 그리 멀어 보이지 않는 길, 당장이라도 백사장 위를 달려 도보여행을 시작한 주문진에 닿을 것만 같지만 다시 돌아가거나 급히 무언가를 해야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백사장에 앉아 걷는 동안 만났던 풍경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만약 뛰거나 차를 탔다면 그 풍경들을 온전히 볼 수 없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하루를 가치 있게 누렸음을 알게 된다. 길은 다시 또 이어지지만, 멈출 수 있는 곳이 있어 더욱 감사한 곳, 사근진해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