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터키 소도시에서 발견한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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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온천,
터키 소도시에서 발견한 기쁨
ISPARTA & ARYON TURKEY'S HIDDEN TREASYRES

그저 낯선 이름으로만 마음이 동해 짐을 꾸렸다. 으스파르타와 아피온, 터키 중서부의 작은 도시 둘. 이름 새벽 들판으로 나가 일꾼들 틈에서 장미꽃잎을 따고, 병도 낫게 해준다는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감탄을 내뱉을 만큼 대단한 여정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일상 속 소소한 행복의 맨 얼굴을 보고 왔다.

ISPARTA
으스파르타. 향기로운 장미의 땅

분홍빛 환영이 아른거린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장미꽃잎이 눈발처럼 휘날리는 이곳은 으스파르타. 은은한 향기에 눈이 절로 감기고, 코 근육이 움찔거리는 묘한 도시다. 어쩌면 갓 세탁기에서 꺼낸 빨래에 스민 섬유유연제 냄새라던가 방금 체크인한 호텔의 침대에 뛰어든 보드라운 순간과도 같다. 봄의 절정을 알리는 장미축제의 첫날, 그 도시의 거리는 거짓말처럼 분홍 꽃비에 젖었다.

분홍빛깔 봄의 잔치

으스파르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이름이다. 발음도 어렵다. 터키 중서부 아나톨리아의 소도시. 여행좀 했다는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전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잘 아는 도시가 하나 나오는데, 파묵칼레다. 그러나 그마저도 서쪽으로 160km나 떨어져 있다. 일부러 목적지로 고르지 않는 이상 으스파르타를 우연히 마주할 확률은 없다는 얘기다.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가 즐겼다던 신비로운 목욕을 마다하고 으스파르타를 선택한 이유는 온전히 단 하나, 장미꽃. 한국에서도 담장마다 만발하는 어여쁜 장미를 볼 수 있는데 왜 굳이 터키냐.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터키의 어느 작은 도시가 온톤 분홍 장미꽃으로 뒤덮인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꽤나 솔깃했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가 하는 '이미 아는 것을 확인하러 가는 여행'에 환멸을 느끼던 터라 뜻밖의 여행지에 마음이 끌렸던거다. 장미 축제의 첫날, 개막식을 코앞에 두고 으스파르타에 도착한 건 엄청난 실수였다. 온 도시가 일상을 포기하고 여기 뛰어들었을 줄이야.



시내 도로는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 오후 3시 퍼레이드가 출발하는 시청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하늘에 수없이 많은 붉은빛 터키 국기가 휘날리는, 누가 봐도 어김없는 진칫날이었다. '매년 5월 중순이면 으스파르타에서 나흘 동안 장미축제가 펼쳐집니다. 올해는 일찍 높아진 기온 때문에 개회시기가 빨라져 11일로 앞당긴 거에요.' 현지 가이드 홀리아의 말에 따르면 장미축제가 처음으로 개최된 건 1985년, 해마다 진행되는 으스파르타 대표 축제로 자리잡은건 1999년부터다. 그저 장미 수확철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행사인데, 도로 위 행진에 뛰어든 사람들은 길바닥에 떨어지는 장미꽃잎 하나에 웃고 떠들며 즐거워했다.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연주하는 악사들, 웨딩드레스에 장미 부케를 든 여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미꽃 장식으로 멋 부린 아이들, 나무 바구니 가득 장미꽃잎을 챙겨 사방팔방 뿌려대는 시민들, 이때다 싶어 빵과 음료수를 이고 나온 장사꾼들까지. 봄바람이 부는 5월이면 분홍빛에 흥분하고, 향기로움에 취해 봄의 낭만을 만끽하는 도시라니. 혼을 쏙 빼놓는 축제에 지치기도 했지만, 그날 눈앞에 그려졌던 순간들이 전부 동화책 속 장면 같았다. '으스파르타에 분홍 장미꽃이 피자 우리 모두 정말 했복했답니다'

온전히 장미를 위한 도시

반드시 새벽이슬을 맞은 꽃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즉, 작업 시간은 하루에 2~3시간에 불과하다는 계산. 귤빌릭 담당자가 설명을 덧붙이길 으스파르타 곳곳에 흩어져있는 장미 농가 8천 곳에서 하루 안에 수확하는 장미꽃 양만 320톤에 달한다고. 이렇게 아침마다 일꾼들이 수확하는 꽃잎은 트럭에 산더미같이 실려 곧바로 공장으로 향한다. '장미오일 만드는 과정은 간단해요. 꽃잎과 물을 섞어 가열해 발생하는 수증기를 냉각 응축시키죠. 위에 얇게 뜨는 막이 장미오일, 아래쪽이 장미수입니다.' 운 좋게 귤빌릭의 담당자를 따라 둘러봤던 공장 내부는 양조장과 많이 닮았다. '장미오일 1kg을 만드는데 무려 4톤의 장미꽃잎이 필요하죠. 아마도 그 양이 2백만 송이쯤일 거예요.' 거대한 스테인리스 통 앞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가리키며 그가 설명을 잇는다. 워낙 농축도가 높은 장미오일은 1kg당 무려 1천만 원 넘는 값비싼 가격에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고.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부터 프랑스의 럭셔리 명품 브랜드까지, 으스파르타 장미 향기의 진출은 독보적이다.

“우리 할머니는 젊을 때, 샤워를 하고 난 다음 장미수로 몸을 한 번 더 씻었다고 해요. 지금도 비교적 저렴한 장미수는 샤워 코롱이나 스킨으로 씁니다. 하지만, 장미오일은 너무 비싸기 때문에 보통 갖고 있는 로션에 한 방울씩 떨어뜨린 후에 바르죠. 다들 5그램짜리 장미오일을 사서 1년을 쓴다니까요.” 터키 국민브랜드로 불리는 로센스Rosense의 향수, 비누, 미스트, 핸드크림 등 갖가지 화장품을 잔뜩 쇼핑백에 담은 훌리아가 이스탄불에서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샀다고 자랑하며 터키 여자들의 장미 사랑을 몸소 보여줬다. 으스파르타에서 후각만 발휘한 건 아니다. 장미로 끓인 차를 마시고, 장미 잼을 빵에 발라 먹고, 말린 장미 잎을 범벅한 터키식 젤리 로쿰도 실컷 맛봤다. 으스파르타 장미 엑스포에서는 최근 등장했다는 장미 커피도 시음했다. 실제로 만나보진 못했으나 터키에는 이름에 장미를 뜻하는 단어 ‘Gül’이 들어있는 사람이 아주 흔하단다. 평소에도 도시는 사방팔방이 장미다. 가로등이며 공원 벤치, 이슬람사원의 수돗가 타일 할 것 없이 장미 문양이 수두룩. 심지어 기념품 가게의 마그넷도 장미로 된 것 말고는 찾기 어렵다. 눈을 못 뜰 정도로 강렬한 핑크색으로 치장된 화장품 가게도 한 집 건너 한 집. 아마 장미를 싫어하고, 분홍색까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이삿짐을 싸야하지 않을까? 으스파르타, 비현실적으로 장미에 취해있는 이 도시. 묘한 매력이 있다.

에이르디르, 푸른 호수의 마을

터키에서 네 번째로 큰 호수, 으스파르타와 차로 30분 남짓 거리에 있는 에이르디르로 향했다. 축제로 흥분된 상태를 잠재워줄 고요한 자연을 찾아서. 으스파르타 시민들도 즐겨 찾는 소풍지인 에이르디르 호수는 바다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거대하다. 짙은 코발트색부터 투명에 가까운 옥색까지 바라만 봐도 황홀한 물빛을 자랑한다. 마을 남쪽의 구불구불 산길을 따라 1,200m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호수의 위엄이 제대로 다가온다. 하늘도 집어삼킬 듯한 호수,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날카로운 바위산 시브리, 고요한 마을의 주홍빛 지붕, 길게 뻗은 호반 도로까지 한눈에 담긴다. 현지 사람들은 전망대 옆 카페에 앉아 터키 홍차를 주전자째 놓고 홀짝거리며 이 청량한 풍광이 내어주는 호사를 누린다. 이곳 마을 이름도 에이르디르, 호수와 같다. 시내는 작고 소박한 편이다. 인구 2만 명의 호반 도시는 주로 어업으로 생계를 잇는다. 여름이면 레스토랑과 카페에 모여드는 손님으로 좀 더 생기가 돌 뿐이다. 최고의 에이르디르 여행법은 발걸음 닿는 대로 돌아다니는 것. 일부러 찾아갈 만한 곳이 없다는 것도 솔직한 얘기다.

이슬람사원에서 기도하는 신도들을 엿보고 에이르디르 성곽에도 올라갔는데, 오히려 재미있는 건 골목마다 마주하는 작은 가게와 평범한 일상이었다. 500원 남짓한 2리라짜리 큰 빵을 파는 베이커리라든지, 우리나라 김밥천국과 같은 케밥 가게, 동네 아저씨들은 다 모여있는 듯한 길거리 찻집, 잘 나가는 멋쟁이들의 아지트 이발소, 호수에서 잡아 올린 생선을 파는 노점 같은. 여행자에게 색다른 볼거리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호수 주변에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낡은 건물들을 한 바퀴 둘러보고, 동네 사람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나면 마치 에이르디르를 다 알게 된 것처럼 뿌듯해진다. 마을에서 호수 바깥쪽으로 길게 숟가락 형태로 뻗어있는 섬이 하나 있다. 전망대에서도 또렷하게 볼 수 있었던 예실 아다. ‘초록의 섬’이라는 뜻으로 에이르디르 산책에서 빼놓으면 섭섭한 장소다. 노을이 흥건해진 물가의 어느 식당, 주인에게서 오늘 호수에서 잡아 왔다는 싱싱한 생선요리를 추천받았다. 터키산 화이트 와인도 곁들여 마셨다. 두둑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일어나는 순간, 귓가로 바람에 찰랑거리는 물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아, 이토록 낭만적인 밤이라니. 흘러가는 대로 보낸 에이르디르에서의 시간이 뜻밖에도 완벽했다.

AFYON
아피온; 치유의 온천 지대

뜨거운 탕에 앉아서 '어이, 시원하다!'라고 탄성을 밷는 우리나라 사람들. 터키 5대 온천 도시로 꼽히는 아피온에서 우리 동네 목욕탕에서나 볼법한 표정을 엿봤다. 씻을 때 수영복을 챙겨 입는 것만 다를 뿐, 달궈진 대리석 바닥에 몸을 지지고,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는 사람들.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진 온천수 효능에 대한 믿음으로 목발 짚은 사람들까지 으리으리한 온천 호텔에 찾아오는 장면을 목격했다.

양귀비와 온천의 땅

'창밖에 보이는 게 전부 아편입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지역에는 아편이 많았대요. 그래서 아예 이름을 '아피온'이라고 지었죠.' 가이드 홀리아의 발언에 버스 안이 술렁였다. 꽃양귀비가 아닌 진짜 마약으로 알려진 아편인지, 요즘 세상에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갖가지 질문이 쏟아졌다. 아피온 교외의 너른 땅은 전부 밀밭, 아니면 아편밭이다. 하얀 양귀비꽃이 몽실몽실 솜사탕처럼 초록 들판에서 아른댄다. 신기해하는 우리를 위해 버스가 잠시 멈춰 섰는데, 평생 생각해본 적도 없는 아편밭 사이를 걷고 있자니 가슴이 떨리더라. 괜히 죄지은 사람처럼. 당연한 대답이겠지만, 아피온의 아편밭은 터키 정부의 철저한 관리를 받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편의 마약 성분은 덜 익은 양귀비 씨방을 칼로 벤 후 흘러나온 유액을 말려서 얻어지는 것으로 아피온의 양귀비밭은 오로지 의학용 진통제인 모르핀 생산을 위한 것이다. 그 양이 전 세계 모르핀 생산량의 70%나 된다고 하니, 이곳의 양귀비 들판이 얼마나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지 상상이 될 테다.

지명 유래를 듣다가 온 관심이 양귀비에 쏠리긴 했지만, 아피온으로 향한 건 그런 이유가 전혀 아니다. 최근 터키에서 온천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는 말에 휴식을 꿈꾸며 찾아간 터였다. 인구 20만 명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에 5성급 온천 호텔이 11개나 들어서 있고, 게다가 터키 전역에서 오로지 온천욕만을 위해 목적지로 선택되는 곳이니 솔깃할 수밖에. 아피온의 온천 호텔에 머물며 마주쳤던 현지 사람들의 자랑도 한결같았다. “기적의 온천이에요. 우린 수천 년 전부터 이 땅에서 솟아나는 물로 치유했습니다.” 아피온은 으스파르타에서 북쪽으로 차로 약 3시간 거리다. 이스탄불에서는 국내선을 타면 1시간 만에 닿는다. 해발 1,021m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시내를 벗어나면 온통 산이고 들이며, 보리와 밀과 같은 곡식을 생산하는 농업과 목축업이 주요 산업이다. 풀이 있는 곳이면 양 떼를 몰고 소를 치는 풍경이 있다. 온천 호텔에서 며칠 지내면서 거의 식재료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식사에 행복할 수 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빵, 치즈, 올리브, 과일, 온갖 허브 등 그 자체만으로 풍요로 운 식탁이 차려졌다. 특히 꿀과 함께 빵에 발라 먹는 터키식 크림 카이막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단 이틀 동안 보고 느낀 점을 미리 풀어놓자면 이렇다. 온종일 온천에서 목욕을 즐기고, 또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운다면 뭐라도 치유하지 못하고 떠나는 사람이 바보라고.

치유를 꿈꾸는 사람들

아피온에 있는 호텔의 이름에는 보통 ‘Thermal’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온천을 이용한, 온천수 치료의’라는 의미. 이 땅에서 솟는 온천수의 효능은 이곳 사람들에겐 두말하면 입 아픈 일이다.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면 쉴 새 없이 효능을 읊기 시작할 테니 주의하길. 휑한 외곽지대에 위치한 온천 호텔마저도 붐빌 정도로 인기가 많다. 저마다 압도적으로 큰 규모와 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하고, 치유와 휴식을 꿈꾸는 이들을 갖가지 온천 시설과 테라피 프로그램으로 유혹한다. 실내와 실외에 각종 온천 수영장이 몇 개씩 있는 건 특별한 일도 아니다. 워터슬라이드와 자쿠지, 키즈풀, 남녀가 따로 이용할 수 있는 수영장도 필수다. 별의별 아로마테라피 프로그램을 갖춘 스파 센터에서는 스킨케어나 마사지를 비롯해 사우나, 머드바스, 닥터피시 등 갖가지 시설을 경험할 수 있다. 당연히 터키 전통 목욕탕인 하맘도 제대로 갖췄다. “예부터 우리들의 피부병이나 관절 질환을 보듬어준 물이죠.” 워낙 주장이 강력해 맹신으로까지 들리는 터키 사람들의 말. 처음에는 그들의 온천수 극찬을 의심했다. 생각이 바뀐 건 코카테페 대학병원에서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난 뒤였다. 코카테페는 수치료로 명성 높은 병원으로 특히 아피온의 온천수가 지닌 미네랄 성분을 이용해 훨씬 뛰어난 치료 효과를 보고 있다고 했다. 

류머티즘 질환, 퇴행성 관절염, 요통을 앓는 환자나 정형외과 수술을 받은 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단다. 정기적으로 터키 보건복지부와 공중 보건학회가 검사해서 발표하는 수질분석표를 봐도 아피온 온천수에 들어있는 미네랄 성분의 수치는 눈에 띄게 높다. 나트륨, 염화물, 중탄산염, 칼슘, 칼륨, 마그네슘, 살리실산, 불소 등 많은 항목의 그래프가 치솟아있다. 전문가의 조언 중 새겨들은 것 하나는 아피온에서의 온천욕은 일광욕과 번갈아가며 해야 효과가 좋다는 것. 호텔마다 야외 수영장과 비치의자, 산책길 조성에 신경을 쓰는 이유도 같은 맥락일 테다. 심지어 호텔의 스파 센터 옆에는 전문의와 물리치료사가 상주하는 클리닉까지 있다. 온천탕에서 물장구치는 데에도 올바른 방법이 있다는 말이다. 하루 이틀 머물러가는 여행자로서 이들이 말하는 ‘기적의 체험’은 불가능하다. 물론 시도는 했다. 아피온 온천수의 은혜를 입고자 수영장과 자쿠지를 오가며 물장구를 치고, 햇볕에 몸을 말리기를 반복했다. 

이때 피부 만큼은 금세 미끄러울 정도로 변했다. 그리고 온천욕의 마무리는 역시 하맘으로 했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져 왔다는 하맘은 공간이나 분위기가 마치 종교시설처럼 경건하다. 전부 대리석으로 된 대중목욕탕 한가운데 조명이 밝게 비추는 마치 제단같은 팔각형의 대리석이 있고, 그 천장은 둥글며, 벽을 빙 둘러서 수도꼭지와 세면대가 딸린 자리가 이어진다. 대리석 타일 문양이나 수도꼭지 장식도 유별나게 섬세하고 아름답다. 하맘에서 씻는 과정은 간단하다. 뜨겁게 달궈진 대리석 바닥에 몸을 달군 후 비누로 깨끗이 몸을 닦고, 세면대에 물을 받은 후 바가지로 퍼서 뿌리는 것. 세신사에게 몸을 맡기는 경우, 대리석 바닥에 누워 있으면 긴 천으로 부드럽게 때를 밀고 난 후 다시 같은 천으로 비누거품을 풍성하게 내어 문질러준다. 아피온 온천수의 위엄일까 아니면 돌바닥에 몸을 충분히 지진 다음이라서 그런 걸까, 하맘을 나서는 순간만큼은 여정의 피로가 스르르 녹아 말끔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정겨운 아피온 골목 산책

터키까지, 그것도 작은 지방 도시인 아피온까지 가서 온천욕만 하고 올 수는 없는 법. 호텔에서 실컷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뒤라면 시내 구경도 챙기자. 큰 기대를 하지 말라던 호텔 컨시어지의 우려와 달리 226m 높이의 바위산 위에 우뚝 솟은 카라히사르가 장엄한 자태로 반겼다. 심심할 뻔했던 도시에 매력 점을 찍은 성채. ‘검은 요새’라는 뜻의 카라히사르는 기원전 1350년에 지어진 이후 통치자가 바뀔 때마다 감시탑과 군사 주둔지 역할을 하며 재건축됐다. “584개의 계단을 오르면 꼭대기에 닿을 수 있어요. 안은 텅텅 비어있지만, 아피온 시내 전망만큼은 끝내주죠.” 울퉁불퉁 바위산과 하나가 된 흙빛의 성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꼭 올라가 보라며 당부한다. 이슬람의 한 종파 수피즘의 사원 메블레비하네 카미도 들렀다. 혹시 흰 옷을 입고 빙빙 도는 기이한 춤을 본 적이 있나? 오른손은 하늘로, 왼손은 땅을 향해 두고서. 그게 바로 수피즘 수도승들이 신과 접신하는 과정인 세마 의식이다.

알고 보면 아피온은 콘야 다음으로 수피즘이 발달한 도시다. 우리에겐 이슬람만큼이나 낯선 종교. 13세기에 지어진 사원 옆 수피즘 박물관을 둘러본 뒤에야 이슬람교의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종파에 대해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코란의 중요성보다는 금욕과 고행, 청빈한 생활을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들로 문전걸식하며 오로지 신만 생각하며, 다른 것은 도외시한다고 한다. 수피즘 사원, 세마 춤을 추는 동상이 있는 곳이 아피온 구도심이다. 오스만제국의 시간에서 멈춘 듯한 옛 골목들은 한가로이 걸으며 둘러보기 좋다. 대단한 볼거리는 기대하기 어렵다. 파스텔 톤의 낡은 나무집들, 창문에 걸려있는 터키 국기, 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린 구멍가게를 기웃거리면서 누구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실없는 여행자 웃음을 지어 보이는 소소한 재미가 있을 뿐이다. ‘Since 1860’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유서 깊은 로쿰 가게에서 엿장수의 것처럼 투박한 가위로 잘라주는 로쿰도 맛보고, 부엌 용품과 농기구 등 갖가지 잡동사니를 파는 작은 시장에도 들르며 어슬렁대는 구도심 산책은 온천수에 몸을 담그고 얻은 안정만큼이나 차분한 평온함을 준다.

아피온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온천 호텔에서의 여유로운 시간과 호화로운 뷔페식사를 포기하고 뛰어든 시내에서 뭉클한 순간이 있었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번화가의 케밥 집에서 손짓과 발짓으로 음식을 시켜 맛있게 먹고 나가는데, 종업원이 홍차를 테이블로 가져온 것. 자기 가슴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며 그가 한 말은 ‘플리즈, 잇츠 마이 기프트’. 좋아서 주는 거니까 마시고 가란다. 아니, 내가 대체 뭐라고 이런대접을 해주나. 그저 먼 나라에서 온 여행자이기에 베푼 차 한 잔이겠지만, 눈가가 촉촉해질 뻔했다. 으스파르타와 아피온. 이전에는 이름도 알지 못했던 터키의 작은 두 도시에서 보낸 시간. 뜻밖의 여행지가 주는 기쁨 역시 감사히 받아 마셨던 홍차와 다름없는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