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감성여행

[ 관광지 ] 바닷길로 이어지는 극동의 유럽

바닷길로 이어지는 극동의 유럽
블라디보스토크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수평선 아래로 잠기는 붉은 해, 밤하늘을 수놓는 은하수 그리고 같은 곳으로 향하는 이들과 나누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밤바다를 유유히 가로지른다.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크 루즈에 오른 순간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
스베틀란스카야 거리

중앙광장, 연해주 청사, 영화관, 백화점, 레스토랑 등이 늘어서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중심, 스베틀란스카야 Svetlanskata 거리로 나가본다. 가장 가까운 유럽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고풍스런 건물들의 모습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을 실감케 한다. 거리를 걷다가 한 건물앞에서 자연스레 발걸음이 멈춘다. 독일식 모던 양식으로 지어진 국영 굼 Gum 백화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손꼽힌다는 말에 수긍이 간다. 중앙광장으로 향한다. 극동지역에서 혁명을 위해 싸운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혁명전사 동상이 중앙광장을 지키고 서있어 사회주의 국가에 와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광장 한편에는 커다란 시베리아 호랑이가 그려진 벽이 있다. 시베리아 호랑이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상징으로 중앙광장 외에도 곳곳의 동상과 벽화 등을 통해 틈틈이 마주치게 된다. 중앙광장은 한민족의 가슴 아픈 역사를 품고 있다. 일제 강점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하여 한때는 그 수가 약 2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인 1937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일본인과 외모가 유사한 한국인을 이주시켜 일본의 간첩활동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연해주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중앙광장에 집합됐고, 강제로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졌다. 그 과정에서 수천 명의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맨몸으로 중앙아시아에서 기구한 삶을 이어가야 했다. 겨울바람이 무심하게 스쳐가는 황량한 광장 위로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가슴 한편이 아스라이 저려오는 느낌이다.



영원을 기원하다, 제독의 광장

스베틀란스카야 거리에서 바다 쪽으로 내려가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베리아 전선에서 희생된 장병을 기리기 위해 제독의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조성된 추모 공원이 보인다. 무명용사들의 모습과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이름이 한쪽 벽면에 새겨져 있고, 2차세계대전 이후 365일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시도 꺼지지 않았다는 영원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영원의 불꽃 뒤에 서있는 작은 정교회 사원 옆으로는 1891년 5월 11일,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의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개선문도 자리하고 있다. 파리의 개선문이나 우리나라의 독립문과는 달리,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선문은 아기자기한 장식과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동화 속 작은 궁전 같은 인상이다. 영원의 불꽃과 개선문 아래에서 손을 잡고 사랑을 맹세하면 영원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달콤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회주의 국가인 러시아에 대한 조금은 딱딱했던 인상이 한결 부드러워진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한눈에, 
독수리 전망대

해가 남아있을 때의 블라디보스토크 전경과 해가 진 이후의 야경을 모두 눈에 담고 싶어 늦은 오후에 독수리 전망대로 향했다. 선로를 따라서 비스듬한 경사면을 오가는 케이블카, 푸니큘로르를 탄다. 정거장 앞에는 작가 푸시킨Pushkin의 이름을 딴 도로와 극장 그리고 그의 동상이 서있다. 비에 젖은 채 두 손을 모으고 서있는 동상의 모습이 어쩐지 작고 슬퍼보여서 불운했던 그의 말년을 떠올려보게 된다. ‘따르릉’하는 자명종 소리가 푸니큘로르의 출발을 알린다. 매표원에게 11루블 약 200원을 건네고 계단구조로 만들어진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다시 한 번 ‘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푸니큘로르는 순식간에 위쪽 정류장에 도착. 얕은 언덕을 걸어올라 도착한 전망대의 중앙에 키릴과 메소디우스 형제의 동상이 서있다. 구 슬라브 문화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성인 聖人으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들이다. 전망대의 철제 난간에는 연인들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걸어놓았을 자물쇠가 빼곡하다. 하나하나 그 모양과 적혀 있는 메시지가 달라 소소한 재미가 느껴진다.



독수리 전망대에 서니 세계에서 가장 긴 사장교인 금각만 대교와 아름다운 항만의 풍경 그리고 고풍스러운 건물이 어우러진 시원한 전망이 펼쳐진다. 멀리 도시의 새로운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는 루스키 대교도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새 해가 언덕 뒤로 모습을 감추자 도시에는 순식간에 어둠이 내려앉고 기온도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불을 밝히는 시내 야경과 바닷물에 비쳐 일렁이는 항구의 불빛 그리고 어둑해진 바다를 가로지르며 멀리까지 이어지는 붉은 빛의 도로가 추위에 돌아서려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석양에 물든 하늘이 까맣게 변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게 만든다.



경건한 화려함, 
포크롭스키 정교회 사원

소비에트 역사학의 최고 권위자로 알려진 포크롭스키 Pokrovskii의 이름을 딴 포크롭스키 공원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녹지공원으로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휴식 공간이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원을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서 각자의 방식으로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문득 복잡하고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한적한 공기가 머무르는 평일 오후의 공원을 천천히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진다. 느린 걸음으로 공원을 한 바퀴 둘러본 후, 공원 입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으로 향한다.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의 국교로, 포크롭스키 대성당은 11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표 성당이다. 파스텔 톤의 연노랑 건물 위로 오후의 햇빛을 받아 금색과 파란색으로 반짝이는 양파 모양의 돔이 멀리서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성당의 내부로 들어서자 온통 금색으로 빛나는 화려한 성당 안에서 사람들이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경건함과 화려함.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공존하며 성당 내부를 신성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로 가득 메우고 있다. 화려함은 어느 순간 따뜻한 색감으로 차분히 마음속에 녹아들어 짧은 시간 왠지 모를 위로와 위안을 받은 기분이 든다.


시베리아 횡단의 꿈,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시베리아 열차 횡단의 시발점,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가까이에서 보니 마치 유럽의 작은 성이 연상되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이다. 모스크바의 야로슬라프스키 역을 모방하여 지어진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구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 중 하나로 손꼽힌다.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기차역의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대합실 천장에 블라디보스토크와 모스크바의 풍경이 그려져 있어서 각 도시의 명소들을 하나씩 찾아볼 수 있다. 대합실 옆으로 이어지는 공간은 궁전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천장과 화려한 내부 장식으로 눈길을 끈다. 역 밖으로 나오니 감성을 자극하는 옛날 증기기차가 여행자들을 반긴다. 증기기차 모형 앞의 기념탑에 새겨진 ‘9288’이라는 숫자는 그 자리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의 거리를 나타낸다. 지구 둘레의 4분의 1에 해당하는9,288킬로미터, 그 길을 달리는 동안 시간대가 일곱 번이나 바뀐다고 하니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얼마나 머나먼 길을 달리는지 알 수 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어제도 오늘도 이곳에서 설레는 가슴을 품은 여행자들을 싣고 내리며 먼 길을 달린다. 언젠가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몸을 싣기 위해 이곳을 다시 찾게 되는 날을 꿈꾸며 멀어져 가는 기차를 배웅한다.


극동의 작은 유럽, 
아르바트 거리

원래 아르바트는 모스크바에 있는 번화가의 이름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아르바트 거리의 본래 이름은 ‘아드미랄라 포키나 Admarala Fokina’. 이 거리에 예쁜 카페와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현지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문화예술을 상징하는곳이라는 뜻으로 모스크바 거리의 이름을 따와 ‘아르바트 거리’라 부르기 시작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 곳곳에서 연주와 공연이 열리는 이 거리는 블라디보스토크의 다른 거리들보다 더 유럽에 가까운 느낌이다. 거리 양쪽에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들이 자리하고 있는데 블린 전문점인 ‘우흐뜨블린’과 러시아의 스타벅스라 불리는 카페 ‘Loading’이 특히 유명하다. 우흐뜨블린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사들고 해양 공원 산책을 나서본다.


소소한 해변 산책, 
나베레즈나야 Naberezhnaya

아르바트 거리를 걸어 내려가면 바닷가에 잘 조성된 해변 공원이 나타난다. 현지인들이 나베레즈나야라고 부르는 이 해변 공원의 시작은 작은 모래사장이다. 차분한 정취가 머무르고 있는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에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오후의 햇살을즐기기 위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다. 한산하고 평화로워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거리에는 그 나름의 운치와 낭만이 곳곳에 새겨져 있다. 산책로를 따라 걸어가니 알록달록한 색깔의 관람차를 탈 수 있는 작은 놀이공원이 보인다.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놀러 온 아이들의 얼굴이 놀이공원 앞에서 환하게 피어난다.


Epilogue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서 남쪽으로 15분 정도 떨어진 땅 끝에 작고 낡은 등대가 하나 있다. 돌아오기 전, 여행의 마지막에 들렀던 그곳의 이름은 마약, 러시아어로 등대라는 뜻이다.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올 때 크루즈에서 보였던 바로 그 등대였다. 사람들은 바닷길을 따라 등대까지 걸어 들어가는 독특한 경험, 그리고 빨간 머리를 얹은 오래된 등대와 양쪽으로 파도가 치는 바닷길이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풍경 때문에 이곳을 찾아온다. 특히 연인들이 많이 찾는데, 등대가 두 사람의 앞날을 환하게 비춰준다는 이야기 때문이라고 한다. 2박 3일의 여행이 끝나고, 동해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를 시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던 그때와 똑같이 밝은 햇살과 파란 하늘이 이제 막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의 며칠이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느낌이다. 생각보다 가볼 만한 곳이 많았고, 그곳에서 만나는 이야기들이 그곳에 머문 시간을 길어지게 만들었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는 동해를 향해 항해를 시작했다. 갑판으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작아지는 금각교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여전히 등대마약은 우리가 지나온 길을 환히 비추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시 동해까지 한번의 일몰과 한 번의 은하수, 또 한 번의 일출이 덤으로 주어졌다.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